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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내 생각

내가 의사파업을 바라보는 생각

2014년 3월 11일. 개원의가 중심이 되어 파업한 오늘을 20년, 30년 후의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소아과의사로서의 나를 아는 내 가족, 친구들은 이번 일에 대해 '내가 아는 의사인 OOO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고 혹시라도 궁금해할까봐,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1. 다음 세대의 한국인들에게 병원이란


처음 드는 생각은, 미래의 의료제도에서 살아갈 내 아이들 걱정이다. 내 아이, 내 아이의 아이가 미국식 의료제도(의료민영화)는 물론, 기상천외한 제도인 원격의료에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어서 내가, 그리고 내 아이가 풍요롭게 살지 가난하게 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자손세대중에는 틀림없이 극빈층이 되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게 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멀리 볼 것 없다. 지금의 나도 당장 건강의 문제가 생긴다든가 해서 돈을 벌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 역시 금방 가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란 나라는 직장을 잃거나 건강을 잃는다면, 혹은 둘 다 잃는다면 빛의 속도로 빈곤층이 되는, 사회적 안전장치 없는 나라가 아니던가. 한국은 부자가 되기는 어려워도 가난하게 되는 것은 무척 쉬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 먹을 것이 있더라도 불안해하며 나의 미래, 내 아이의 미래, 내 아이의 아이의 미래, 그러고도 여유가 된다면 내 아이의 아이의 아이의 미래에 먹고 살 것까지 마련해놓으려고, 밤낮없이 애를 쓰고 돈 벌 궁리를 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그나마 아직까지는 세계의 여러 나라에 비해서는, 들인 돈에 비해서는 비교적 양질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데, 이와중에 정부는 지금의 국민들이 너무 풍요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돈 없으면 치료받기가 더 어려워지는 나라로 만들겠다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다 안다. 의약분업때에도 의료비가 늘어날 거란 우려에 대해서 정부에서는, 일단 시행해보고 보완하자는, 그놈의 '선시행 후보완'을 외치며, 때로는 의사들을 돈만 아는 탐욕스런 인간이라고 정죄하면서, 또 어떤때는 몇몇 의사들만을 청와대로 따로 불러 당근을 주고 회유시키면서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지금 나는 파업할 때가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미래를 위해, 아니 나와 내 가족의 미래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쉬는 날없이 어디가서 알바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어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미래에 내가 받게 될 진료가 지금처럼 의사의 눈과 귀로 보고 듣고, 손으로 눌러보고 만져보는 진료가 아니라 기껏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수준의 진료라니. 내가 의사라서 누구보다 잘 안다. 모든 환자들은 의사에게 정확한 진단을 바라는데, 그러려면 눈으로 보고(시진), 귀로 듣고(청진), 손으로 두드려보고(타진) 만져보고(촉진)해야 하며, 그전에 충분히 어떻게 아팠는지 이야기를 들어야(문진) 한다. 솔직히 모든 것을 동원해도 진단을 못내리는 환자도 많다. 그러다보니 병원에 가면 이 검사 저 검사 하지 않는가. 그런데 컴퓨터 화면만 보고 진단을 내리라고...어이없어 웃음만 나온다. 


싸움터에 나가는 장수에게 갑옷이 없으면 하다못해 겨울철 잠바라도 입혀서 내보내고, 칼이 없으면 돌멩이라도 쥐어주고라도 내보내야 될텐데, 의사에게는 무기와 갑옷을 있는 것마저 풀러놓고 컴퓨터 화면으로만 진단하고 처방하라니... 진단의 정확도는 불보듯 뻔한 거다. 시진,청진,타진,촉진,문진을 해도 진단이 어려울 때가 많은 걸 의사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후에 내 가족과 내 아이들은 컴퓨터화면으로 얼굴보고 처방하는 의사에게 처방을 받게 하라니... 이쯤되면 이 제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준이 이렇다. 기술이 없고 배우지 않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못배워서 그려러니 하겠지만, 전세계에서 학구열이 제일 높고 문맹율은 제일 낮은 나라, 올림픽하면 웬만하면 10위권 정도는 하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럴 때보면 외국인 친구가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쪽팔려서 어디서 말도 못하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열심히 조금씩 모은 돈으로 내 미래의 치료비 뿐만 아니라, 그 병원에서 도입하는 원격의료장비 구입비까지 보태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돈의 일부는 원격의료장비 만드는 회사로 흘러 갈 것이다. '벼룩의 간을 내어 먹어라'는 속담은 이런 상황에 쓰라고 있나보다.


2. 미국인들이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오늘 의사들의 파업을 보면서 지금의 미국을 생각한다. 지금의 미국은 많은 분야에서 세계 일류의 국가이지만, 그 나라에는 온 세계의 조롱을 받는 제도가 (내가 아는 한에서는) 두 가지가 있다. 개인의 총기소유허가와 의료제도이다. 잊을막하면 들려오는 미국의 총기사건으로 인한 사망사고를 보면 한국인인 나는, 한국에서 총기의 개인소유가 허가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안그래도 성격 급하고 스트레스 많이 받는 한민족에게 총을 허락한다면 그로 인해 엄청난 사고가 생길 것이라 예측되기 때문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총기사고로 생명을 잃고 있어서 개인의 총기소유를 계속 허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여론이 잠시 일어날 때도 있지만, 여전히 총기회사의 로비로 인해서인지 법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 여럿이 총기로 인해 생명을 잃어서 온 국민의 마음을 슬프게 되더라도, 잠시 총기소유에 대한 논란이 있는 듯 하다가는 어느덧 잠잠해진다. 그러면 총기회사들과 그들의 로비를 받은 정부는,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은 안중에 없이 자신들의 당장의 이익을 유지했다는 기쁨에 조용히 뒤에서 기뻐한다. 


그러고보니 의사들이 파업을 하는 듯 하다가도 며칠 지나지 않아 금새 잠잠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정부입장에서는 언론을 통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닫아버리면, 그리고 나서 며칠의 시간만 보내면 의료제도보다 국민들의 피부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사건 몇 개만 뉴스에 흘려보내주면, 당장 하루하루 살기가 바쁘고 힘든 국민들로서는 지금 미래가 어떻게 바뀌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채 의료제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백년 혹은 이백년 전의 미국에서도 비슷했을 것이다. 국가가 어느정도 경찰력이 생겨 치안이 유지되면서부터는 없어졌어야 하는 제도임에도 여전히 총기회사의 조직유지와 이익을 위해 법이 바뀌지 않고 있다. 그들이 가진 돈이 크기 때문이다. 다 돈의 힘이다.


의료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의 의료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지만, 의료제도는 그렇지 못하다. 손가락이 두개를 다쳤는데 돈이 모자라면 한개만 치료하는 나라. X레이를 한장 찍으면 10-20만원이 청구되고, 응급실에라도 들어가는 순간부터 백만원 단위로 진료비가 올라가는 나라. 그들의 의료기술은 부럽지만 의료제도는 부럽지 않다. 미국 의료제도의 문제점은 이전부터 여러차례 지적되어서 수차례 바꾸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효과적으로 개선하지 못했고, 사람의 아픔을 덜어주고 생명을 구하려는 순수한 정신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래서 결국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일부 보험회사의 이해득실(거액의 치료비가 있느냐, 보험료를 낼 수 있느냐)에 따라 치료가 제한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역시 돈의 힘이다. 


돈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돈이 모든 가치보다 높이 평가되는 곳이라면 그곳은 지옥이 된다. 총과 의료제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은 분명히 지옥같은 나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의료제도를 미국을 따라가려고 한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의료제도를 따라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말이다.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며, 아이러니한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