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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클래식

[클래식] 정명훈과 서울시향


포스터이미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 베토벤 교향곡 5번.


베토벤 5번 교향곡이, 왜 다시 쓰여질수 없는 교향곡인지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녹음을 왜 그리도 꺼려했는지

분명히 알게 해준 공연


본질과 모형. 그 둘의 차이를 내 세포수준에서 느낄 수 있게 해 준 공연이다. 그동안 내가 즐겨 들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즐겨 들을 mp3나 CD의 소리는, 실황연주의 그림자를 기록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했다. 모형으로 들었던 음악도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그 음악의 본질인 오케스트라의 실황연주를 들으니 모형은 모형일 뿐이었다. 헤드폰으로는 들리지 않던 여러 연주자들의 크고 작은 소리가 눈앞에서 오케스트라를 통해 내게 다가 왔는데, 이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만 보며 그리워하는 것과 눈앞에 실제로 다가온 연인을 보는 것이 다른 것만큼이나 분명한 차이이다. 그렇다고해서 나는 앞으로도 헤드폰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늘 들을 수 없는 본질을, 비록 부족한 점은 있을 지언정, 언제나 듣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일 감사히 들어야 하는 것이다.


융의 말처럼 과학은 눈으로 관찰가능한 것만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이기에, mp3와 CD, 혹은 기술이 더 발달하여 원음에 가까운 어떤 것이 나오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음에 가까운 것이지, 원음 그 자체는 아니다. 오늘 그 원음을 듣자 그동안 내가 헤드폰으로 들었던 교향곡은 하나의 모형이었음을-비록 그것이 지휘자와 과학기술력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비로소 깨달았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의 모양을 비슷하게 담아낼 수는 있지만 본질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카메라가 발달하여 눈과 비슷해진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카메라가 사람의 눈과 비교하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력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본질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하게 표현할 수는 있지만,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사랑에 대해 아름답게 노래한 시는 사랑에 대해 표현된 것이지, 그것이 사랑 그 자체는 아닌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의 그 강렬함과 달콤함을, 마치 그림자와도 같은 시를 읽으며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한다. 본질을 흉내낸 모형만으로도 본질의 위력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구약의 제사는 모형이고 신약의 십자가는 본질이라고 한다. 구약시대에 동물의 피로 드린 제사는 모형이고,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가 본질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두가지의 차이를, 나만의 이해방식으로는 mp3로 듣는 음악과, 오늘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의 차이로부터 미루어 짐작해본다. 또한 성경에서 곳곳에 보이는 놀라운 지혜의 말씀 혹은 이해가 어려운 역설적인 표현도, 모형과 본질의 차이로부터 미루어 짐작해본다.


지금의 시대를 과학이 종교의 위치에 올라간 시대라고도 하는데, 나는 과학은 어디까지나 모형이고 본질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을 통해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은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본질의 여러가지 특징을 눈으로 관찰가능한 기술을 통해 사람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현상들. 삶과 죽음, 그리고 행복과 고통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동안 mp3로만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듣다가, 오늘 정명훈과 SPO의 베토벤 5번 교향곡을 들으니 내게 형성된 가치체계안에 큰 울림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