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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냅

[겨울휴가] 성바오로 피정의 집 1

2014. 2.24-25


많은 것 혹은 풍요로움을 가지면 그것이 평안을 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 풍요로움이 즐거움을 주는 시간은 그 풍요로움을 모으기 위해 애썼던 수고와 기대에 비하면 훨씬 짧다. 그럼에도 그 짧은 희열과 만족감 혹은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쩔 수 없이 정신없는 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이다.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의 끝에서 이틀 남은 올해 겨울휴가를, 마침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성바오로 피정의 집을 알게 되어 그곳에서 침묵을 들으러 가기로 결정했다.


오후 1시반,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실 요량으로 인근 번화가의 커피숍을 찾았다. 나는 조용한 커피숍을 좋아하는데, 커피숍은 거의 대부분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고 그러기에 항상 분주한 사람들로 가득차며 늘 시끄럽다. 게다가 주인은 그 시끄러움을 덮어버리고 말겠다는 듯이 더 시끄러운 음악까지 틀어놓는 경우도 많다. 오늘 간 곳도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반항심 같은 것이 생겨서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꼭 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헤드폰을 끼고 Bach의 Cello suite 3번을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니 소란한 중에도 내가 듣고 싶어하는 (혹은 필요했던) 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나, 역시 소음 속에서 오래있을 것은 못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약속된 시간이 되고, 주문한 커피도 거의 다 마셔갈 무렵 시끄러움과 바쁨이 얼마나 나를 지치게 하는지 충분히 확인한 후에야 인근에 있는 피정의 집으로 갔다.


피정의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커다란 침묵이 나를 두른다. 숙소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내가 문을 여닫는 삐걱거림, 걸으면서 신발이 끌리는 소리 정도이며, 심지어 글씨 쓸 때의 사각거림조차도 잘 들린다.




숙소는 3평 남짓하여 작은 편이었으나, 생각해보면 개인 피정자에게는 차고도 넘치는 공간이다. 혼자 누울 수 있는 침대, 책상과 의자, 옷장 그리고 유일한 전자제품인 스탠드가 구비되어 있다. 옛날이었다면 양초 한 자루가 있었겠지.





그에 비해 내가 가지고 온 짐은 꽤 많았다. 두 벌 옷과 카메라, 아끼는 AKG헤드폰, 책 3권(제네시 일기, 토마스 머튼의 묵상의 능력, 클래식 시대를 듣다), 세면도구 그리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체크카드와 현금까지. 먼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서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싸는데, 생각보다 챙길 것이 많아서 잠시 당황했다. 평소의 나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을 놔두고 홀연히 떠날 수 있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같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떠나게 되자-그것도 1박 2일의 짧은 여행임에도- 내가 생각보다 많은 것에 얽매여 있고, 또 스스로 그것들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커피만 봐도 분명해지는데, 피정의 집에 커피가 없을 것 같아서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는 4200원짜리 카페라테를 마시고 오지 않았는가. 침묵을 들으러 온다고 하면서도, 일상의 분주한 생활에서 내가 소유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을 한 가지도 포기하기 싫은 것이다.





피정의 집에 들어온 순간, 나를 기다리던 침묵을 바로 만난다. 그리고 침묵해야만 내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기도에 도움이 되는 글 모음에 적혀 있던 글, '다른 사람을 치유한다고 믿으면서 당신 자신은 치유할 수 없게 만들거나 기도를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아... 지금의 나에게 이보다도 더 필요한 말이 있을까. 마치 나를 수천년전부터 미리 정확하게 알던 존재가 내게 해주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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