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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냅

[겨울휴가] 성바오로 피정의 집 2

2014.2.24-25

이 곳 성당에서 침묵 속에서 기도를 올린다. 내 겉을 감싸는 위선과 내 속을 채우는 욕심이, 그리스도로 변하게 해 달라고. 실상 여태까지의 내 기도는, 나 스스로가 얼마나 잘났으며 그러기에 앞으로도 계속 잘나게 해달라는, 위선과 탐욕의 기도이지 않았는가.



십자가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산책로를 따라가며 침묵속에서 기도를 한다. 실제 십자가의 길은 이곳 아름다운 산책로처럼 평화롭지도, 고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피정의 집에서는, 길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겪었던 일들을 비석으로 만들어 놓았다. 실제의 십자가의 길은 힘들고 괴로웠으며, 충분히 억울하고도 남았을 길이다. 나는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일로 작은 손해가 생기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 그것으로도 억울해하지 않는가. '아버지의 뜻대로'라고 기도하고 나서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그리스도를 생각해본다.





바람소리와 새소리만이 들리는 침묵속에서 그 옛날 사막 교부들이 했다는 "고독 고요 그리고 내적 평화 속에 살라"는 말과, 예수의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를 여러번 되뇌여본다. 침묵 덕분인지 산책로를 내려오면서 들은, 꿈이있는자유의 '마음 다해' 가사가 내 마음에도 크게 들린다. 


"마음 다해 주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면 주 너의 길 지키시리 지켜주시리"


내가 평소에 기도할 때에 '주님 저와 저희 가족을 지켜주소서'라고 자주 기도했는데 오늘 이 노래가 비로소 나에게 크게 들린다. 나의 길을 지켜주신다는 약속이, 그리고 그 약속을 위한 조건도 이 말씀 속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저녁식사는 평소 내가 먹던 것이 비해 단촐하다. 물론 자유배식이어서 양껏 먹으려면 먹을 수는 있으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식사후에 보니 따뜻한 오가피 차가 있었고, 그 옆에는 커피를 비롯한 몇 가지 차가 있었다. 커피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따뜻한 차를 마시게 되어서 그랬는지, 차는 내 차가운 손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 이런 뜻일까...


둘째날 아침은 토스트와 과일, 따뜻한 차, 누룽지였다. 아, 사람이 이정도 음식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평소의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무엇이 불안하기에 그리도 바쁘고 정신없게 살고 있었던 것인가. 여기에 오니 나를 가리고 있던 많은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는 말씀 속에 얼마나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던 것인가. 그러고보니 10년전의 나로서는 가지기 어려웠던 많은 것을 지금 가지고 있다.




안개가 자욱히 낀 둘째날 아침. 이 또한 아름답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비춰지기를 그리도 갈망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이 곳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산책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평소의 내 생각대로라면, 클래식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선물로서 충분히 '영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이곳에 오기 직전에 들린 카페에서는 바흐의 첼로모음곡을 들었다. 그러나 커다란 침묵이 있는 여기에서는, 음악을 들으려면 이보다 더 듣기 좋은 곳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예상과 달리 클래식음악은 전혀 듣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나는 여전히 클래식매니아이며, 클래식음악속에 숨겨진 자연의 아름다움과 창조주의 섭리를 보고 즐겨 듣긴 하지만, 이번에 분명히 알았다. 음악을 통해 얻는 즐거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자유주의신학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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