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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내 생각

resignation

의사이기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의사로 살아가려면 환자를 보는 것이 소명이 되어야 한다. 불안과 고통이 있는 사람을 공감해주는 긍휼, 그리고 능력이 된다면 문제해결을 도와준다는 이타심. 이 두가지가 의업을 지속해나가야할 이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그리 녹록치 않다. 소명에 따르는 삶을 방해하는 것으로는, 우선 의사 자신에게는 실력이 부족해서 환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무능력함, 환자수를 늘려 성과를 인정받아 많은 봉급을 받고 싶은 욕심,  처음 본 사람의 말을 믿기 어려운 사람의 본성이 있을 것이며, 경영측 입장에서는 인건비 대비 병원 매출을 늘리고 싶은 마음, 혹은 성과가 좋지 않을 때 충분히 기다려주지 못하고 섣불리 의사를 해고시키거나 성과에 대한 압박을 주는 것이 그럴 것이다. 환자수가 일정수 이상 늘어날때는 또 다른 위험이 생기는데, 의사 자신이 정신적 체력적으로 지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순간에 환자는 도와줘야 할 대상에서 빨리 해결해버려야 할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아니, 의사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하면서 나쁜 의사 운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사도 사람이며 직원이다. 다만 고용주가 개인인지 국가인지가 다를 뿐. 경험상 그 일정수는 과마다 다를텐데 신경외과를 전공한 친구 말로는 하루 40명이라고 하며, 산부인과의 경우 5-60명정도라고 한다. 소아과의 경우 60-70명정도 인것 같으며 최대로 생각해도 하루 100명 정도인 것 같다. 미국의 의사들은 하루 10-20명을 진료하는 것도 힘들다고도 하는데, 쓰고보니 씁쓸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대충하더라도 빨리빨리' 가치관이 자리잡힌지 오래인 것을. 아무튼, 100명 이상의 환자의 이야기를 친절히 들어주며 일이 아닌 사람으로 여기며 진료한다는 것은, 어쩌다 한번이라면 모를까 지속적이라면 무리가 간다. 무리가 지속되면 결국 고장이 나는데, 고장이 나는 부위는 몸과 마음 둘 다이다.


그러고 보니 본과 실습때 했던 진료참관이 생각난다. 그때 내가 봤던 교수님들이 나의 미래였던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대부분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처방을 내려주는 평이한(?) 진료를 하였는데 그 중 인상깊은 교수님이 두 분 생각난다. 한 분은 진료 틈틈히 옆에서 참관하는 학생에게도 질문도 하고 설명도 해주며 열심히 진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또 다른 분은 그야말로 환자가 너무나도 귀찮다는 듯이 진료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전자는 30대후반의 젊은 교수였고, 후자는 50정도 되어보이는 중년의 교수였다. 물론 그 젊은 교수님도 지금쯤은 후자의 교수님처럼 중년의 나이가 되셨을테니 진료스타일 또한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것을 보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두번째 교수님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분이 환자에게 많이 하던 설명(?) 때문이다. 바로 '약 먹고 봅시다'라는 말었는데, 환자가 무슨 질문을 더 하는 경우에도 많은 경우에는 대답 역시 '그러니까 약먹고 봅시다'였다. 그 분은 수술을 주로하는 진료과의 교수님이었는데, 결국 수술을 해야 낫는 경우를 많이 보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수술을 좋아하시고 외래진료는 덜 재미있게 느끼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내 입에서도 진료중에 같은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보호자가 이러저러한 질문을 하는데 내가 '약 먹고 지켜봅시다'만 반복하고 있던 것이다. 뒤에 기다리는 환자는 많고, 처방이야 달라질 게 없으니 나도 어느덧 그렇게 되었다. 물론 나와 신뢰관계(rapport)가 형성되지 않은 환자였지만, 그러긴 하더라도 봉직초기의 나였다면 다르게 대처했을 것이다. 순간 십여년전 내가 봤던 중년의 교수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래전 내 안의 나에게 던졌던 질문이 다시 올라왔다. 나는 왜 의사가 되었고,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조금 더 나아가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문과생들은 톨스토이의 작품 제목부터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의사이면서 과학의 관점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나로서는 현대의 뇌과학, 사회심리학에서 오랜 관찰끝에 내려진 결론이 마음에 더 와 닿는다. 물론 고전이나 과학의 결론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보는 관점의 차이일 뿐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외부의 보상이 아닌 내적인 가치임을 분명히 한, 로체스터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L. 데시의 연구결과를 보더라도, 혹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이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이타심을 발휘할 때라고 결론짓는 뇌과학을 보더라도 내 질문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답을 바꿀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의사인 나에게도 이러한 사실이 적용될 수 있으며 적용되어야 한다. 다른 부차적인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만약 부차적인 것들이 의업 자체를 지속할 첫번째 우선순위가 된다면 그 순간 내가 하는 일은 지루한,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미 어느정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 병원을 떠나서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한다.


자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무시하지 않는다. 큰 병원에 붙어있어야 오래 버틸수 있다는 말, 혹은 큰 병원에서 근무해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높이 평가한다는 말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가 하는 진료를 즐겁게 바꾸어주지 못한다.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다보니 접하는 사람들 중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 간혹 이상한 사람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착하고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진료를 하고 있으며, 동시에 또 어떤 사람들은 착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진료를 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같은 사람이 선해졌다가 악해질 수도, 악해졌다가 선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낮은 의료수가. 그것도 참 무섭다. 내가 하는 일이 하루 종일 입에 단내가 날 때까지-단내가 날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단내가 난다- 일을 해야 직원들 급여를 줄 수 있고 병원유지를 할 수 있는 현실. 정직하게 진료할수록 저수가로 인한 부담은 더 커져서 무언가 다른 형태로 수익을 내어야 되는 현실. 심지어 이제는 정부에서도 저수가를 솔직하게 인정해서, 의료법인이 다른 수익사업을 하도록 허용, 아니 권장하려고 하는 현실도 참 무섭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나마 저수가 조차도 받기 어려울 정도로 환자가 줄어드는 것이며 그래서 폐업하게 되는 병원이 많아진다는 것도 참 두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 사는 동기 1.0으로 살아야하는가, 아니면 성과만을 높이기 위해 애쓰는 동기 2.0으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답게 일에서 만족감과 성취감을 누리는 동기 3.0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이제는, 다니엘 핑크의 표현으로 하자면 동기 2.0인 내 동기부여체계의 운영체제를, 동기 3.0으로 업그레이드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아직 충분히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