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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헤르만 헤세전 방문기

 

외부세계에서 내게 요구하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어 한가해질 법한데도, 내 마음은 몸이 바쁘던 시기의 습관 그대로 남아있어 여전히 정신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몇시간을 약간의 불안과 긴장감과 초조함에서 보내고 되돌아보면 지난 시간동안 한 것이 거의 없는 생활, 즉 효율을 매우 추구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극히 비효율적으로 살게 되는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헤르만 헤세'전시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가 보게 되었다. 곰곰히 되짚어보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예기치 못한, 우연한 일들인 경우가 많다.

 

데미안의 작가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를 직접 느끼게 된 것은, 작년 여름휴가때의 일이다. 소설 '싯타르타'를 휴가기간동안 읽었는데 그동안 내가 해왔던, 삶에 대한 종교에 대한 많은 고민들이 한권의 소설 속에 온전히 녹아있는 것을 보며, 나는 크게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싯타르타'는 불교 승려가 되려는 '고빈다'와, 불교에서 만족하지 못해 떠나는 '싯타르타'의 이야기이다. 기독교에 만족하지 못해서 떠났던 적이 있었기에 싯타르타에게 큰 공감을 느끼며 읽었다.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는 종교 용어일 것이며,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두 위대한 종교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에 들어가자마자 있던, 헤르만 헤세의 삶을 요약한 이 글이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삶의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 '융 박사를 만났다는 것', 의미있는 '꿈'을 꾸었다는 것, 마흔에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융기언Jungian인 나에게는 '융Carl Gustav Jung'이라는 글자가 제일 반가웠다. 구체적인 시대와 지역, 상황은 달랐어도 내가 느끼는 괴로움을 헤세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의 작품 '싯타르타'가 내게 큰 감동을 주지 않았을 터이니.

 

 

전시회를 보면서 헤세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보니 책을 판매하고 있었다. 유리알 유희같은, 더 유명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보리라 생각하고, 일단 '삶을 견디는 기쁨'이라는 에세이집을 구입했다. 제목은 너무 가볍게 위로해주는 책 같아보여 잠시 망설였지만, 나와 비슷한(혹은 더 강렬한) 고통을 겪었다면 책이 가볍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너무나 평범해보이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구입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위로해주는 에세이를 여러권 읽었었는데, 그때마다 책의 내용이 겉도는 느낌을 받았었다. 마치 세상에서 살아보지 않고,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 설교단에서 '세상을 이기라, 승리하라'고 핏대높여 외치는 성직자의 목소리처럼만큼이나 공허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당신은 너무 지쳐있어, 청춘은 아픈거야'같은 식의 메시지를 주는 책은 일부러 멀리했다. 

 

헤세의 책은 달랐다. 아니, 헤세의 책이 다른 것인지 그동안의 내가 달라진 것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심리 에세이를 읽을 때의 나는 20대였고, 사회생활, 결혼, 육아 등의 삶을 본격적으로 접하기 이전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느정도 그런 생활을 겪었다. 오랜 노력으로 내가 그토록 원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성취했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원했던 것들은 그만큼의 괴로운(신경증이라고도 하는) 것을 같이 가지고 왔다. 헤세는 괴로움을 충분히 겪었던 듯 하다. 괴롭지 않고서야, 그리지 않던 그림을 40세가 되어서야 그리기 시작했을까. 그만큼 그는 절망했을 것이다. 본인 또한 "질곡많은 인생을 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책 제목도 '삶을 견디는 기쁨'이다. 괴롭지 않고서야 견딜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생은 장밋빛이라고, 화려한 세상에서 기쁨을 즐기라는 가벼운 메시지는 유효하지 않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이 책을 숙독한다고 해서 내 삶의 괴로움이 덜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꽤 오랫동안 나는 그리 생각해왔다. 그래서 책을 매우 열심히 읽었었다). 내 괴로움은 내가 겪어야 할 몫이 있다. 다만 그 괴로움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한 종류의 괴로움을 겪고, 정신치료와 꿈, 그리고 그림과 자연을 통해 위로를 받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는 오늘 필요한 만큼 이상의 위로를 받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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