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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저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출판사
김영사 | 2007-07-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신의 존재를 의심하라, 인간의 능력을 주목하라! 신이라는 이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 종교계의 칼 마르크스가 쓴, 무신론자의 바이블


간혹 인터넷상에서 종교, 그중에서도 사회적으로 많은 민폐를 끼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설전이 벌어질 때마다 종종 인용되는 책인 '만들어진 신'을 읽었다. 종교의 폐해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때마다 '리차드 도킨스가 쓴 책을 읽어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번 추석명절때 우연히(혹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기독교인인 내가 이 책을 읽고서 받은 느낌은, '리처드 도킨스'는 공산당선언을 한 칼 마르크스 같다는 느낌이다. 물론 나는 1960, 70년대의 우리나라에서처럼 약간의 공산주의 냄새만 있어도 '빨갱이'라고 몰아치던 관점에서 보는 칼 마르크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의 힘으로만 운용되며 그 자체로는 다수의 인간에게 비참함을 선물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자연경과를 예고했던 마르크스를 말한다. 사실 마르크스가 제안한 이념은 크게 왜곡되어 인류에 큰 상처를 남기고 실패로 끝났지만,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단점을 보완하여 수정자본주의가 태어나도록 하지 않았는가. 나는 리처드도킨스를 무신론자의 교주로 보지 않는다. 나는 그를 인류 역사상 종교가 벌여온 폭력, 즉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에 저항하는 한 인물로 본다.


다만 노동자계급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지고 왜곡시켜, 어떤 면으로는 자본주의보다도 더 잔인하게 대중을 괴롭혔던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을 직접 당한 사람들-이 리처드 도킨스의 사상을 가지고 이를 왜곡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마음 한 켠에는 남아 있다. 



2. 며느리들에게 제사란?


내 주위에는 시댁살이를 심하게 하는 며느리들이 몇 명 있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한국에서는 '시'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시금치'도 싫어한다는 농담반진담반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시댁에서 받는 크고 작은 다양한 시달림에 지쳐있는 며느리가 많다. 간혹 그런 시댁이 '일부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비판을 들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사다. 며느리 입장에서는, 특히 한국의 종갓집 며느리의 마인드가 전혀 없는 경우라면 제사라는 행사는 아무 의미없이 자신을 괴롭게만 하는 '종교적 행사'에 그친다. 그러나 한 편으로 제사는, 돌아가신 집안어른을 기리는 의미있는 의식이라고도 한다. 과연 어느쪽 말이 옳은 말인가. 아마도 현대사회에는 전자의 의견이 강할 것이고(또는 강해져 갈 것이고), 조선시대까지는 후자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강했을 것이다.


'만들어진 신'에서 말하는 '신' 혹은 '종교'라는 단어 대신에 '제사'를 대입하면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도킨스에게 제사란 전혀 의미없는 행사이며,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든 젊은 여성을 더 힘들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의식일 뿐이다.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이해하자면, 도킨스가 '만들어진 제사'라는 책을 썼다고 생각하면 적절해보인다. 내가 이런 해석을 하는 이유는, 도킨스의 책 내용이 모두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싫어하는 '제사'를 없애기 위해 혹은 '제사'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제사는 만들어진 것이라라고 주장하는 철학책 같다.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면서. 그리고 솔직하게도 8장에서는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과학적인 책인 동시에, 자신의 철학이 깊이 관여된 책이라고 솔직히 인정한다. 밑에서도 이야기 하겠지만 도킨스가 싫어하는 종교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한다. 나도 그런 종교는 싫다.


3.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도킨스는 '눈 먼 시계공'이란 책을 통해, 진화가 오랜시간을 걸쳐 '자연선택'의 결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동의한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는 자연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높은 절벽의 비유를 한다. 이런 비유다.


'사람들이 높은 암벽이 있는 산을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신만이 올라가게 할 수 있다, 라고 하지만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암벽 뒷편에 아주 완만한 비탈길이 있다. 그래서 앞에서 볼 때는 올라갈 수 없는 산 정상에, 뒤편에 있는- 그래서 잘 안보이는- 완만한 길을 천천히 올라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다만 그러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언뜻 보면 합리적(과학적)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이 비유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가가 궁금하다. 높은 산에 이르는, 아주 길고 거의 평지에 가까울정도로 완만한 길을 만든다면 높은 산에 "저절로" 올라가게 되는가?  공을 그 길 초입에 놔두면 아주 오랜시간동안 아주 길고 평탄한 길을 공이 "저절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도킨스는 "저절로"라는 단어 대신에 "자연선택으로"라는 단어를 넣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힘 때문에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지는 대답을 피한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 "행운에 의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피한다. 종교의 폐혜에 대해 자신있게 공격하려는 태도는 책 전반에 깔려 있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자신없어한다. 화학물질만이 있다가 '행운에 의해' 최초의 진화가 나타나서 생명체가 출현했다....고 한다. 나는 그 대답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대답 만큼이나 비과학적으로 보인다. 도킨스는 창조의 끝에 있는 신에 대해 아무런 '합리적인' 설명 없이 '스스로 있는 신'이라고 한다며 비판한다. 그런데 그는 '행운에 의해'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둘다 같은만큼 합리적인 주장이다.


4. 무신론자의 바이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무신론자의 바이블이라고 부른다. 맞는 표현이다. 다만 '바이블'이라는 비유에서처럼, 정말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기만 한 책은 아니며, 오랜기간 힘있는 종교에게 괴로움과 핍박을 받아온 사람들이 애절하게 기다려온 책이어서,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마치 자본주의에 시달린 수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기달려온 것처럼. 기독교인인 내 입장에선, 이 책이 종교의 폐해, 특히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을 조금이라도 없애는데 도움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 다만 그러다가 혹시나 정말로 중요한 것까지 함께 버리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마치 스캇펙의 표현처럼 '아기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기까지 함께 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런지는 걱정이 된다. 이전에 마르크스의 사상을 맹렬히 따르다가, 스탈린식 공포정치가 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5. 어린왕자와 만들어진 신.


도킨스의 날카로운 해석을 한줄한줄 읽다가 문득 나는, 생 떽쥐베리의 '어린왕자'가 떠올랐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책인데, 특히나 그 책에서 내가 아끼는 문장, 이를 테면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같은 문장들은, 도킨스의 관점으로 보면 모두 폐기해야 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생 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폐기하고 싶지 않다. 도킨스도, 그리고 도킨스의 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들도, 생 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폐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세상은 정말로 차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6. 신학자 Tom Wright의 일화


도킨스가 책 앞머리에 쓴 것처럼 '사탄의 책'만은 아니다. 다만 종교에 대해 왜 이러한 비판이 나올수 밖에 없었는지는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도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내 생각으로는 기독교인 중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 대신 하나님과 이웃을 분리시켜서, "하나님은 사랑하되 이웃은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도킨스가 싫어하는 종교인들이 '이웃을 미워하는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자Tom Wright의 일화를 인용해본다. 내가 믿는 신이, 혹은 내가 믿지 않는 신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가장 신뢰받는 신학자인 톰 라이트Tom Wright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개론'을 가르치는데, 어느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하더랍니다. '교수님,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제가 이 과목에서 얻을 것이 있습니까?' 톰 라이트가 그 학생에게 대답합니다.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그러자 그 학생은 머뭇거리면서 그동안 주워들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는 톰 라이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지 않네. 그것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믿음이네. 어디,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겠나?"

(pp35-36,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김영봉, IVP)


사실 기독교를 믿는 입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고민이 그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하나님인가? 이 대답에 yes라고 대답한다는 것은, 내가 하는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게 되고 하는일마다 잘 풀리고 주위에 고통스러운 일이 없게 도와주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고 바라게 되면 종국에는 나라는 사람은 이기적인 괴물로 변해간다. 그러면서도 당장 눈 앞에 닥친 괴로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너무 괴롭다. 가만히 있으면 이기적인 괴물이 되지만, 한 편으로는 괴물이 되기 싫어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 그것이 인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