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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생의 수레바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생의 수레바퀴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
출판사
황금부엉이 | 2008-03-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마지막 메시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살다보면 여러 스승을 만난다. 그 중에 책을 통해서만 만나게 되는 스승이 있다. 내게는 헨리 나우웬, C.S.Lewis같은 기독교사상가와 스캇 펙, 에리히 프롬, 요아힘 바우어 같은 정신과의사가 그러하다. 오늘은 여기에 정신과 의사 한 명의 이름을 더 넣기로 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에 대해 발견한 사람, 호스피스운동의 선구자라고만 알고있는 그녀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파란만장했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의 삶이 언제나 그렇듯 그의 삶도 큰 감동을 주었다.


2. 정직 혹은 솔직


정직이란 단어가 내게 주는 의미는, 하루하루 살아가면 살아갈 수록 더 깊어만 가는 것 같다. 어릴 때 내게 정직이란, 집에서 무언가 사고를 치고 나서 엄하셨던 아버지에게 내 잘못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진지한 의미까지 포함한다. 여기에는 내가 저지른, 숨기고 싶은 잘못 뿐만 아니라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외부로부터 받은 도움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솔직'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정직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의과대학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사실이지만 의학에는 한계가 있다. 또 한 가지 의과대학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사실은 자비심이 거의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점이다(p.136)'


사실 많은 의사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에도 무엇이 두려운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의학의 한계이다. 의학이 건강에 관한 모든 문제를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지금은 아니더라도 더욱 기술이 발달하면 인간의 고통을 없애줄 것이라는 기대, 그것이 지금도 의과대학에 만연한 풍토이다. 사람이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스스로 의학은 완벽하다고 생각해야 환자들 앞에 자신있게 설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병 중에 대부분은 원인을 모르며, 병의 치료법도 대부분은 '자연치유'이다. 의학이 개입해서 도움이 되는 일부 질환이 있을 뿐이다. 그 일부 질환, 예를 들면 감염질환을 치료하는 항생제의 발견, 죽을 병을 치료하는 응급 수술법의 발견 등 일부 의학기술이 준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하기에 마치 의학이 완전한 것처럼 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부 질환에 경우 의학기술이 명백히 도움이 될 뿐이다. 의학이 완벽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대감때문인지, 모든 고통을 자기의 능력으로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의학이 완전하지 않음에도 완전한 것처럼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엘리자베스의 솔직한 표현은 큰 용기 없이는 하기 어려운 말이다.


3. 인간의 잔혹함


'나는 마이다네크에 오기까지 인간의 잠재적 잔혹성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화차에 쌓여있는 아기 신발을 바라보거나, 희미한 장막처럼 공기중에 떠도는 죽음의 악취를 맡기만 하면,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쉽게 느낄 수 있었다.(p.98)'


'자신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안다면 당신도 놀랄 거에요. 나치 독일에서 자랐다면 당신도 아무 거리낌없이 이런 짓을 하는 인간으로 변할 수 있어요. 히틀러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어요(p.96)'


올해 초 '유럽사 산책'을 읽으면서 처절하게 느꼈던 인간의 잔혹함, 그에 대한 통찰을 이 책에서도 짦은 문장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평소 스트레스가 덜한 상황에서 가끔씩 친절한 것을 보고 스스로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책 속에 골다라는 인물의 표현처럼, 히틀러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다. 누구라도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 혹은 나치 독일처럼 모두가 그렇게 하는 상황이라면 그 곳에서 히틀러만큼 악하게 행동할 것이다. 다만 지금의 상황이 그렇지 않을 뿐이다. 지금 그러한 갈등과 괴로움이 없다면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최고의 환경에서 가끔씩 보이는 친절함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그것이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아닌가...


4. 소아과의사가 될 뻔 했던 그녀


엘리자베스는 미국에서 레지던트를 들어갈 때 소아과를 지원한다. 그러나 그 당시 임신한 여자의사는 일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소아과에 합격한 후 임신하게 된 그녀는 소아과레지던트를 포기하게 된다. 이듬해 다시 소아과레지던트를 지원하지만 그 때도 임신 때문에 포기하게 되고, 우연히 정신과의사가 된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제를 고민하고 관찰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을 돕는, 이른바 '죽음학'이라는 분야의 개척자가 된다. 후에는 에이즈 감염자를 돕는 일을 하게 된다.


소아과의사인 나는 요즘 정신과에 관심이 많아졌다. 대학에서 배운 정규 정신과는 큰 흥미가 없었지만-그래서 학점도 D를 받았지만- 사람의 삶과 죽음의 문제, 고통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살면 살아갈 수록 너무나도 자명하기에, 그와 관련된 정신과의사의 책을 즐겨읽고 있다. 소아과의사가 되려고 하다가 정신과의사가 된 그녀와, 소아과의사가 되고 나서 비로소 정신과에 관심을 갖게 된 내 삶이 대조적인 것 같다는 느낌이 잠시 머리속을 스쳐간다.


진로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던 중 잠시 웃음이 나온 부분이 있다. '면접의 끝 무렵에 오닐 박사는, 격일 24시간 근무라는 스케쥴은 임신한 레지던트에게는 정말로 무리라고 설명하면서 내 답변을 요청했다(p.144)'는 부분이다. 저자가 레지던트를 하던 때로부터 50여년 후인, 2000년대의 대한민국의 대학병원 소아과에서는 임신여부에 관계없이 레지던트 시작시기에는 약 2개월간 퇴근하지 않고 병원에서만 근무했으며, 그 시기를 지난 후에는 36시간 근무 12시간 off의 스케쥴로 일을 한 내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올 수 밖에. 그나마 인원이 충분치 않을 때는 60시간 근무 12시간 off의 스케쥴이던 때도 있었고. 의사들 입장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보다도 50여년 전의 미국 의사가 더 환경이 좋았던 것도 같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스스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니 미국의사와 비교만 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고생하는 의사들이 많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언론으로부터 돈만 바라는 집단이라고 매도당할 때는 조금 속상하다. 실제로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또한 대부분은 돈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5. 에필로그-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


저자의 여러 주장중에는 이전부터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있다. 죽음의 의미에 대한 것인데 나는-아직은 명확히는 알 수 없지만-죽음을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여긴다.  마치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월 가까이 자라는 태아가 뱃속에서의 삶을 마치고 자궁을 나와서, 뱃속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전혀 다른 놀란운 세상을 만나듯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각자의 인생을 마치게 되면 죽음 이후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뱃속의 태아가 이 세상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듯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종교, 그리고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처럼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들의 연구결과가, 사후세계에 대한 단서를 전해 줄 뿐이다. 이와 관련된 여러 종교와 연구결과 중에,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기독교의 교리가 믿을 만하다고 여겨져 나는 기독교를 믿고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많은 경우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서 두려뭄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런 이유이다. 그런데 저자는 죽음을 직시하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을 돕는다. 정신과라는 의학의 한 분야가 그 특성상 삶과 죽음을 가까이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제목을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이다'라고 붙였다. 이는 스캇 펙이 그의 책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정의한 '사랑'과 매우 비슷하다. 스캇 펙은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아직도 가야할 길, p.113)라고 정의하고, 사랑의 목적은 '정신적 성장'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삶에 대해 깊이 연구한 두 정신과의사가, 삶에 대해 같은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이러한 태도가 '진리'라는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진리 그자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진리의 한 파편'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두 정신과의사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삶과 죽음에 대해 이해한 바는,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1) 살면서 느껴지는 크고 작은 여러 괴로움은, 실제로 자신의 욕심을 버려가는 일종의 죽음의 과정이다. 큰 괴로움을 겪게 되면 큰 욕심을 버려야 되고, 작은 괴로움을 겪게 되면 작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2) 어느 때는 욕심을 힘들게 버려야 되지만, 어느 때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도 해결되기도 한다. 물론 이럴 수 있다면 그는 은혜받은 사람이다. 


3) 그렇게 욕심을 버려가다보면 어느덧 버릴 욕심이 많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육체의 생명에 대해서도 포기해야 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를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부른다.


4) 이전부터 삶의 여러 고통속에서 힘들더라도 크고 작은 욕심을 버려온 사람은, 남아 있는 욕심이 많지 않아서 죽을 때 버릴 것도 많지 않다. 그런 사람은 죽음이 덜 두려워진다. 잃을 것이 많지 않으므로. 


5) 그 대신에 정신적 성장이라는 열매를 얻는다. 욕심을 버림으로서-날마다 크고 작은 죽음을 경험함으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죽음 이후에 삶을 더욱 준비된 상태로 만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살면서 만나는 많은 고통은, 욕심을 버리는 일종의 작은 죽음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육체적 죽음 이후까지도 지속되는 생명을 키우는(준비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6)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의지도 영향이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절대자의 은혜(도움)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고통을 스스로 잘 극복하고 성장했다고 자랑할 수 없다. 다만 절대자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겸허히 말할 수 밖에 없다. 


6. 책 속에 나오는 기도


두고두고 기도하고 싶은 기도문이 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신이시여, 제게 주소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