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기위해서 올해 2일 남은 휴가중에 하루를 사용했다. 소중한 것을 얻기위해서는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한다고 했던가. 결과적으로 올해 남아있는 이틀의 자유중에 하루를 기꺼이 사용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이 영화를 본 셈이 되었다. 3시간에 달하는 긴 영화였지만, 마치 영화속에서 소개된 상대성이론이 이 영화를 봤던 영화관에도 적용된 듯이 영화를 보는 3시간은 아주 짧게 느껴졌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천문학 혹은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물리학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의학을 전공했으며 경제학, 분석심리학, 그리고 클래식음악에 관심이 많은 나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우선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세계 각국의 정부와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미래가 다가온다. 지난 20세기에 범한 잘못이 전 세계적인 식량 부족을 불러왔고, NASA도 해체되었다. 이때 시공간에 불가사의한 틈이 열리고, 남은 자들에게는 이 곳을 탐험해 인류를 구해야 하는 임무가 지워진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인류라는 더 큰 가족을 위해, 그들은 이제 희망을 찾아 우주로 간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는 20세기에 인류가 범한 잘못으로 인해 인류 전체의 식량난이 유발되어,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인류가 새로 거주할 행성을 찾기 위한 시도를 계속한다. 그 중책을 맡을 사람으로 엔지니어인 '쿠퍼(매튜 맥커너히)'가 선택되어 우주를 탐험하게 된다. 과학기술(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과학에 대해 보냈던 그 절대적인 신뢰로 인해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새로 거주할 행성도 발견못하고, 지구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쿠퍼는 인류가 살만한 또다른 행성을 찾기위해 우주를 탐험하다가 시공간을 넘나들게 된다. 지구에서 흘러가는 시간과는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게 되어(행성에서의 1시간이 지구에서의 7년) 이미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 시간과 연료가 부족해 지구로 귀환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던 중에 블랙홀에 빠지게 되는데, 빛까지 흡수하는 블랙홀이기에 블랙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기에 미지의 영역이다. 그런 블랙홀에 빨려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소멸된다는 것을 뜻했을 것이기에 그 순간 느껴지는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보면 근대역사에서 기존의 신본주의를 벗어나 18세기이후 계몽주의가 유행하면서, 인류가 이성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발휘해 주었으나 머지않아 인류 전체를 파멸의 위기로까지 몰고간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과도 이야기가 닮았다. 사건의 발생 뿐 아니라 그때그때 느껴졌을 감정까지도. 영화속에서 인류에게 새로운 탈출구 혹은 피난처를 보여줬던 우주 탐험은 그 자체로는 전혀 그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이는 현실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일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과 매우 닮았다. 특정 상태, 특정 사건이 행복을 준다기보다는 그 일과 관련된 많은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좋은 대학만 가면 행복해질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대학을 나오고도 행복하게 인생을 풀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결혼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결혼 자체가 행복을 준다기보다는 결혼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꿋꿋히 풀어갈 때 행복을 느낀다. 다만 그 문제들이 개인을 압도할 정도로 무겁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려운 문제에 걸려 갈등이 많아지고 싸우는 날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행복해지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또 사람들은 많은 돈 혹은 좋은 집, 좋은 차가 있으면 행복해질거라 기대하지만, 실제로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재산이 많아서 더 큰 갈등이 생겨 불행해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몇가지로만 요약해서 '그것만 있으면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당한 어려움을 누군가와 같이 풀어나가는 그 과정이 삶을 더 의미있게 하는 것 같다.
영화속으로 되돌아와서, 그 블랙홀에서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일어난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구에 있는 쿠퍼의 집으로 연결된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우주공간을 탐험한 것인데, 그 끝에서는 다시 지구의 집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갑작스러운 이러한 반전은, 쿠퍼가 탐험했던 곳이 실제 우주였는지, 아니면 사람의 몸에서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복잡한 공간인 뇌였는지, 혹은 의식적으로는 알기가 무척 어려운 무의식의 세계였는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쿠퍼가 탐험한 곳이 우주, 뇌 혹은 무의식 어디가 되었든간에 쿠퍼는 블랙홀처럼 기존의 질서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곳으로 가게 된다. 블랙홀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는 3차원이 아닌 (영화속 표현으로 하면) 5차원이기에, 사랑하는 딸 머피(제시카 차스테인)에게 직접(3차원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대신 쿠퍼는 신비로운 현상-3차원의 관점으로는 신비하기만 하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을 일으켜서, 과학자가 되어있는 머피에게 메시지를 전해주어 인류를 위험에서 구출하게끔 유도한다.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세계가 아니기에, 쿠퍼가 머피에게 신호를 보내는데에는 지구에서의 물리적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자유롭게 넘나든다. 마치 소설책을 읽는 독자가 내용이 이해되지 않으면 책 앞부분으로 가듯이, 혹은 읽었던 부분은 건너뛰어 뒤로 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어릴 때 머피에게 메시지를 던졌는데 의도대로 되지 않자, 성인이 된 머피에게로 가서 다시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5차원의 쿠퍼가 바꾸고자 했던 3차원(지구)의 현실에서도 역시 쿠퍼가 살고 있다. 쿠퍼는 3차원(지구)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5차원(우주의 블랙홀 속)에 있는 것일까. 이쯤되면 장자에 나오는 '나비의 꿈'이야기가 스쳐지나간다. "어느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출처: 장자, 오강남 풀이)". 영화속에서도 쿠퍼는 자신이 지구에 있는지, 우주에 있는지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나, 곧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지구에 있는 쿠퍼를 위해 우주(블랙홀)에 있는 쿠퍼 자신이 메시지를 던져주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비의 꿈'을 가지고 '인터스텔라'를 해석하자면, 지구에 있는 쿠퍼는 장주이며, 우주에서 지구속 자기 집안을 보고 있는 쿠퍼는 나비인 셈이다. 처음엔 자신이 나비가 된 것인지, 혹은 나비가 자신이 된 것인지 혼란스러워하지만 곧 같은 존재인 것을 안다. 그런데 지구를 벗어나 우주에 도달하기 전에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구를 벗어나야 다른 차원의 존재여부라도 알게 되는 것이다.
장자의 사상과 비슷한 통찰이 서양의학에 접목되어 만들어진 것이 분석심리학이다. C.G. 융이 창설한 분석심리학의 관점으로 보자면, 우주는 무의식이며 지구는 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쿠퍼로 대변되는 인류는 의식의 영역인 지구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을 마음껏 소비했으며 모든 자연현상을 분석했다. 그리고 자연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 기술을 계속 개발해나갔다. 그 결과 지구를 의도대로 다스리지 못할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큰 식량난이 생겨 지구를 탈출하지 못하면 멸망하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처음엔 의식의 영역(지구)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있었으나 고통(식량난)을 통해 무의식(우주)의 영역으로 탐험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거기에는 탐험에 대한 동경을 유발하는 쿠퍼의 무의식(아니마,내적 인격)이 작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주를 탐험하며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엄청난 위압감과 공포감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대한 후에야, 쿠퍼는 지구에 있던 자신 뿐 아니라 우주 전체가 결국 자기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기실현을 한 것이다. 그제서야 멸망의 기로에 섰던 인류는 살아남을 방법을 전해 받게 된다.
인류가 지구 대신 살 곳을 찾은 곳은 거대한 규모의 우주정거장이다. 그 곳을 지구와 매우 비슷하게 꾸며놓아서 사람들이 계속 살게 된다. 새로운 터전에는 지구의 땅과 같은 편평한 땅도 있지만, 마치 그릇 위에 그릇 하나를 뒤집어 얹어놓은 듯한 모양으로 땅이 이어져있다. 다른 표현으로하자면, 그동안의 인류는 동그란 지구의 겉표면에서 살았다면, 우주로 탈출한 인류는 지구같은 구의 안쪽면에서 사는 셈이다. 이는 마치 돔구장의 바닥뿐 아니라 지붕에도 거꾸로 매달려서도 사는 것 같은 모양인데, 이를 처음 본 쿠퍼는 신기해하나 이미 거기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생활이 매우 자연스럽다. 장자나 분석심리학은 눈으로 보이는 현실세계 뒤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세상을 생각하고자 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가리켜 흔히 '뒤집어 읽기'라고도 한다. 그런데 영화속 인류가 새로 정착한 터전은, 기존 인류의 눈으로 보면 바로 있는 것과 뒤집혀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공존하는 세상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 시작부분에, 먼지로 뒤덥혀 더이상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세상에서 그나마 음식을 깨끗이 먹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접시 뒤집어 놓기'가 소개되었다. 뒤집힌 접시 속에는 먼지가 들어오지 않아 깨끗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은 뒤집힌 접시였고, 영화의 끝은 접시처럼 뒤집힌 세상이다. 처음과 끝이 통한다.
클래식음악 중에도 처음과 끝이 통하는 곡이 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인데, 이 곡은 30개의 변주를 사이에 두고 앞 뒤로 같은 아리아가 연주된다. 곡의 시작과 끝이 같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곡은 불면증으로 힘들어하던 러시아 백작(카이저링크)를 위해 바흐가 작곡한 곡인데, 불면증을 치료하는 곡, 즉 잠을 자고 꿈을 꾸게 하는 곡이다. 우주여행이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는 것, 그리고 C.G.융이 꿈을 통해 무의식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을 곰곰히 생각하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 곡은 마치 꿈속의 세계를 연주하는 듯이 다양한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차분한 분위기로 연주되는 처음 아리아에서는 잠결에 빠지는 것 같다. 그러면 곧이어 흥겨운 선율의 1번 변주가 시작하는데, 마치 '자아(의식)가 잠들었으니 꿈(무의식) 속 여행을 시작해보자'는 듯이, 꿈의 세계가 흥미진진한 음악여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서두에서 알려주고 시작하는 듯 하다. 이후로 이어지는 30개의 변주는 다양한 꿈 속 여행만큼이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30번째 마지막 변주(Quodlibet)에서는 변주 전체를 아우르며, 그리 많지 않은 음표를 사용하여 감정을 하늘 위 구름에 올려놓을 듯이 고양시킨다. 그리고 나서야 처음에 연주되었던 아리아가 다시 연주(Aria Da Capo)되면서 '자, 이제 꿈 속의 환상적인 여행은 서서히 정리하고, 꿈을 꾼 자아가 숙면을 취하도록 오늘의 꿈 속 여행을 정리하자'는 듯이 차분한 분위기로 마친다. 이 곡의 연주시간은 연주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1시간(Glenn Gould 47분~ Rosalyn Tureck 74분)가량 되는데, 3시간짜리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는 동안 마치 1시간정도의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은, 내가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는 동시에 골드베르크변주곡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게 된다.
'독후감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트루먼쇼, 1998 (0) | 2016.06.05 |
---|---|
[영화]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0) | 2015.02.12 |
[영화] 레 미제라블, 1998 (0) | 2014.07.01 |
[영화] Groundhog Day, 1993 (0) | 2014.05.21 |
[영화] A late quartet (0) | 2013.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