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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깊은 강, 엔도 슈사쿠, 민음사

깊은 강, 엔도 슈사쿠


제도적 종교에 대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개인의 신념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 작가 엔도 슈사쿠. '침묵'을 두번째 읽고 1년 후 '깊은 강'을 읽었다. 이 두권의 책을 읽고나니 비로소 종교에 대한 또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 해소된 듯한 느낌이다. 이런 질문들이다. 나는 어째서 교회를 열심히 다닌 할머니의 손자로 태어났을까. 그리고 할머니의 손자 넷 중에 유일하게 대학시절까지, 아니 그 이후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교회를 다니며, 삶의 문제를 (서양 종교인) 기독교로 해결하려고 애쓰며 살게 되었을까. 완전한 답은 알 수 없지만, 이제 마흔이 가까워진, 엔도 슈사쿠의 소설을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게 된 나이가 된 지금에야 비로소 그 질문에 대한 나만의 대답이 가능해진 것 같다.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출생지에 따라서, 살면서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개인의 종교가 달라지는데, 일부 사람들-특히 특정 종교에 지나치게 열정적인 사람들-은 출생지, 주위 사람에 관계없이 특정 종교만을 믿어야 되며, 그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태어나보니 기원전 1세기 삼국시대의 한반도에 태어난 사람은 예수를 못 만나고 못 믿었기 때문에 지옥에 가야 되는가, 태어나보니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문명을 전혀 접하지 못한 채 토착종교를 믿는 사람은 무슨 종교를 가져야 하는가. 그 사람이 기독교를 가지지 못한 것은 누구의 죄인가. 유럽은 19세기에는 기독교가 융성했지만, 20,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기독교 신도의 수가 줄어들었는데, 그럼 현대의 유럽인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가. 그 반대의 경우, 이를테면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세계적인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인데 개인의 인격은 매우 보잘것 없다면, 아니 예수를 믿기 전보다 믿은 후, 그것도 대형교회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는데도 인격이 더 망가졌다면 그 현상은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류의 질문은 수백 수천가지씩 쏟아져 나올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해 내가 고민하고 어느정도 얻게 되었던 생각을, 엔도 슈사쿠의 두 권에 책에서 분명히 정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제도적인 기독교에서는 위험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자넨 어째서 불교신자로 되돌아가지 않나?(p.184)"


나는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서 개신교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구원의 완성, 즉 성자가 되는 것,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예수를 닮는 것, 성화 또는 그 무엇이라 표현하든간에 그 상태에 도달하려면 역설적으로도 종교적인 열정들, 이를테면 성경을 많이 읽고 암송하는 것, 기도와 예배에 오랜 시간을 쏟는 것 같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은 결코 의식적인 행위를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으며, 무의식을 통해 의식이 재배치될 때에야만 개신교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 사람이 변해간다. 그래서 아마도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온 4명의 일본인이 같이 인도 여행을 하는 이야기다. 나중에 내가 인생을 더 산 후에 읽게 된다면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고 그리워하는 '이소베'라는 인물이나, 여러남자를 만나 연애를 해보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와 결혼했으나 결혼의 의미를 찾지 못한 여자 '미쓰코', 동물과 대화를 할수 있는 동화작가이면서 세 번의 큰 수술을 받아 겨우 삶을 다시 찾은 '누마다', 혹은 전쟁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전후 일본을 살고 있는 '기구치'라는 인물에게 공감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처음 읽은 이번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오쓰'라는 인물에 가장 큰 공감을 느꼈다.


오쓰. 그는 대학에 와서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는 인물이다. 사교성이 떨어지는 그를 골려주려고 미쓰코는 일부러 술자리로 오쓰를 불러 난감하게 만든다. 미쓰코가 쑥맥이었던 오쓰를 유혹해 관계를 갖자, 오쓰는 자신이 처음 경험한 여자인 미쓰코를 진지하게 결혼할 여자로 생각하지만, 미쓰코는 오쓰를 유혹했다가 버리는 것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여자였다. 오쓰는 크게 낙담하여 기독교에 귀의하려 한다. 프랑스 리옹에 있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신부서품을 받으려 하지만, 오쓰의 신앙은 신학교에서 요구하는 것과 차이가 있는지 끝까지 신부서품을 받지도 못한다. 


표면적으로는 기존의 제도적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믿음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오쓰이지만, 나는 그의 진실한 고백속에서, 어쩌면 기독교가 자리잡기 이전부터 사람이라는 존재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원초적인 종교적 본능을 느낄 수 있다.


'저는 아직 신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신학교의 성직자 선생님들로부터 저는 신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순종의 덕이 모자라고, 진짜 신앙에 필요한 원칙을 잃어버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순종의 덕이 부족하다는 것도 진짜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도, 제가 변함없이 유럽식 기독교만이 절대라고 여겨지지 않는다고 답안에 쓰거나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제각기 믿고 싶은 신을 선택하는 것이 태어난 나라의 문화나 전통이나 각자의 환경에 의한 경우가 많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럽 사람들이 기독교를 선택하는 것은, 그 가정이 그러하거나 그 나라에 기독교 문화가 강하기 때문이겠지요. 중동 사람들이 이슬람교도가 되고 인도인 대부분이 힌두교도가 되는 것도, 다른 종교화 자신의 그것을 엄격하게 비교해서 선택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p.181-2)'


'대립이나 증오는 나라와 나라뿐만 아니라, 상이한 종교 간에도 이어진다......사람은 사랑보다는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어느 나라건 어느 종교건 오랫동안 그렇게 지속되어 왔다(p.293)'


대학생시절 오쓰는 아마도 제도적 종교를 열심히 믿으면 현실-사교성 없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쑥맥인 현실-로부터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을지 모른다. 혹은 자신에게 진심으로 의미있는 생활은 세상에서 필요한 공부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대학이 아닌 성당에 있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쓰라는 인물에게 무한한 공감을 느꼈다. 나 역시 대학과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을,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면,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표면적으로는 내세의 구원을 믿고 있었으나, 그 당시 나의 의식과 무의식은 현실에서의 구원-보다 원만한 적응-을 바라고 있었다. 처음 연인으로서 관계를 맺은 미쓰코도 오쓰에게는 구원자로 느껴졌을 것이다. 남자로서 매력이 없다고 스스로 느꼈던 그를, 미쓰코가 일시적으로나마 구원해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시적인 구원이었기에, 그녀와 헤어지고 더 큰 좌절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를 구원해줄거라 믿었을 제도적 기독교(소설에서는 카톨릭)에 자신의 삶을 건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도 그를 거부한다. 그의 신학이 카톨릭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카톨릭에서는 그에게 '순종의 덕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에게 순종의 덕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가졌던 신앙에 대한 생각들-성장환경이 종교선택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것과 범신론적 사상-이 카톨릭과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카톨릭에서도 거부당한다. 나 역시 내가 가졌던 생각이 제도적 기독교와 달라 갈등을 겪은 적이 있다. 덕분에 나는 십여년간 같이 젊음을 보냈던 교회공동체를 떠나게 되었다. 떠날 당시 들었던 말도 오쓰가 들었던 말과 매우 유사했다. '차라리 불교를 믿게나'


나는 이 소설속에서 사용된 표현중에 '유럽식 기독교'라는 표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한국에서 자라면서 경험했던 기독교는 '한국식 기독교'였다는 것을 서른이 넘을 즈음부터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절대적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일반적으로 제도적인 종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식'에 불과한 것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순간부터 종교가 본래 가졌던 생명력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생명력이 사라지기 시작한 종교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생명력을 바라며 추종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생명력은 종교 경전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생활에서 그 생명력을 경험하는 것은 그야말로 '바늘 구멍에 밧줄이 들어가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고민의 끝에서, 아마도 나보다 훨씬 깊이 고민하고 삶을 치열하게 살다가 떠났을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통해서, 내 마음은 위로를 얻으며 종교의 대한 번민의 큰 줄기 하나를 일단락 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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