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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책] 하느님도 아프다. 곽건용.



하느님도 아프다

저자
곽건용 지음
출판사
한울 | 2003-12-27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은이의 설교와 그가 걸어온 신앙생활을 되짚은 글들을 엮은 책이...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책이 필요한가.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는 많은 땅을 주겠다는 악마에게 속아 결국 아무 땅도 갖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농부 바흠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에게도 땅 욕심이야 있겠지만 땅 살 돈이 없다보니 현실적인 고려대상이 아니고, 대신에 책 욕심은 조금 있는 것 같다. 남들보다 많이 알고 싶다보니 이책 저책 읽게 되고, 읽고 싶은 책이 많다보니 언젠가부터는 항상 2-3권의 읽을 책을 미리 구입해두고 쫓기듯이 읽고 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책 읽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새로운 책을 구입해서 읽기도 하지만, 몇 년전에 읽고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책을 다시 정독하기로. 이런 다짐이 마치 톨스토이의 이야기에 나오는 농부 바흠이 해가 한창 중천에 있을 때 '아, 이제는 방향을 꺾어야겠구나'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동안 내가 읽은 몇권의 책에서 얻은 지혜라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나의 지혜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비로소 깊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번에 다시 읽은 책은 '하느님도 아프다'이다. 속표지에 보니 '2004년 2월. 홍영진교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내가 적어놓은 메모가 보인다. 내가 의사국시를 마치고 의사면허를 취득한 후, 내 지도교수님이신 소아과 홍영진교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책이다. 학생 때부터 지도학생과 지도교수님의 인연으로 알게 되어, 교수님의 영향을 받아 소아과를 지원하게 되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 소아과전문의까지 되었으니,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다. 9년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도 좋았던 기억이 있지만, 지금 다시 읽으면서 그야말로 한 장 한 장 감탄하면서 읽었다. 


어떤 사람들은 책의 저자 곽건용목사님을 보고 '자유주의'라고 비판할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한신대학교는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잘못된 학교, 잘못된 교단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곽목사님은 정말 하나님(혹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분이라고 느껴진다. 진심은 통한다는데, 곽목사님의 진심이 전해져 온 것일까. C.S.Lewis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아무리 괴상하기 짝이 없는 종교라 할지라도, 진리의 최소한의 파편은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자신의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전체가 틀리다고 갖다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조금 있더라도 배울 수 있는 나머지 부분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태도 같다. 그래서 이 책을 끝까지 한 줄 한 줄 정독했는데, 사실 이 책에는 진리의 '많은' 파편이 들어있다.


2. 성경을 대하는 태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은, 그것이 영원 불변하고 고정된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그 하느님과 대화하고 동행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p.26)'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조건 좋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살인하지 말라"라든가 "도적질하지 말라"와 같은 당연한 계명들에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중략) 인큐베이터 안에 있던 제가 어느 날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세상을 알게 됐다는 말입니다......"도적질하지 말라"고 점잖게 타이르면 "너도 사흘 굶어봐라, 도둑질 안 하고 견디나!"하는 대꾸가 대번에 튀어나오는 곳이 세상이었습니다.(p.37)'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 안되고, 절대적으로 순종(혹은 복종)해야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살아보니 참 어렵다. 내가 게을러서이기도 하고, 이유없이 순종해야만 하는 때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유를 알고 나서야 따를 수 있을 것 같은 때도 정말 많다. 아마 남들보다 나에게 그런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교만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내 나름대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에 나같이 의심이 많았던 사람이 한 명(도마)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은 내게 큰 위안이 된다.


곽목사님도 이런 고민을 정말 많이 하신 분 같다. 이런 고민 자체가 신성에 도전하는 것처럼 여기는 기독교문화에서 자라왔는데, 곽목사님은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을 두둔하며 어떤 때는 당연히 의문을 품어야 한다고도 한다. 기독교에 남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 자체를 해보지 않고 '단번에' 믿어진 사람들이거나, 고민 끝에 해답을 찾은 사람들일 것이다. 기독교에 남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 자체를 해보지 않고 '단번에' 믿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고민 끝에도 해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인 것 같다. 나는 '단번에'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끝에 해답을 찾고 싶었고, 어느 정도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곽목사님은 나보다 먼저 이런 고민을 더 깊이 했고, 더 먼저 더 명확한 답을 찾은 분 같다.


그런 고민 끝에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달리 읽힌다. 같은 부분에서도 감동을 받는 부분이 달라진다. 아직 나는 성경을 잘 모르지만 이제는, 사람이 욕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욕심의 관점으로 성경이 읽혀서 내가 끝없이 높아지게 되고, 사람이 낮아진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그제야 높으신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같은 욥기를 읽고도 어떤 사람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기억에 남기는 반면, 어떤 사람은 '내가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듣기만 했지만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말씀을 기억에 남기는 차이가 생기는 것 같다.


3. 만일 하느님이 없다면


'만일 하느님이 없이 어떻게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느냐 말이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서 살 것인가?' (본 회퍼)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은 하느님이 없더라도 선하게 살기는 커녕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얼마든지 악에 빠질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p.68)'


사람이 선한가?  성선설과 성악설 중에 어떤 것이 옳은가? 이전의 나는 답을 내리기 어려웠지만, 지금의 나의 답은 명확하다. 성악설이다.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비록 아름다고 귀한 모습이 일부 있긴 하지만) 악하다. 증거는, 세상이다. 살아보면서 몇 번 속아보고, 몇 번 억울한 일을 당하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그러고보면 나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피해를 준 일이 적지 않다. 


4.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보상신학이라는 보편적 진리 안에 계십니까? 그것도 소중합니다. 그 진리를 사랑하십시오. 보편적 진리를 넘어서는 복음의 자유를 만끽하고 계십니까? 그 자유 역시 소중합니다. 그 자유를 사랑하십시오. '자유'에서 '복종'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계십니까? 문턱에 서 있는 동안에는 불안해하지 말고 그 긴장을 사랑하십시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자유'에서 '복종'으로 열려있는 문턱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문턱을 넘어서서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세계를 기대와 희망을 갖고 함께 만나보고자 권하고 싶습니다(p.135)'


곽목사님은 신앙의 발달 단계를, 보상신학을 추구하는 단계, 복음의 자유를 만끽하는 단계, 하느님을 사랑해서 복종하는 단계로 말한다. 나는 지금 보상신학을 추구하는 단계를 벗어날까 말까 하는 정도인 것 같다. 자유스럽긴 하나 자유를 만끽한다기보다는 방종에 가깝기 때문에, 아직 보상신학을 벗어났다고 하기에 무리가 있다. 나는 이러한 '자유스러움' 때문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자유주의자'라며, 그런식으로 기독교를 믿으려면 차라리 불교를 믿으라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도 아직 보상신학의 수준 혹은 자유가 아닌 방종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는 자유 그리고 그 너머 '복종'의 수준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반에서 꼴등을 한다고 해서 중위권을 지나 상위권에 들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런데 곽목사님이 쓴 이 부분, 특히 '그것도 소중합니다. 그 진리를 사랑하십시오'부분을 읽고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마치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로부터 환영을 받았을 때 느낌이 이와 비슷했을까. 지금 하고 있는 고민,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수준, 그것이 높은 수준의 신앙과 인격을 가진 눈으로 볼때는 별거 아닌것처럼 보여도, 그 고민의 수준에 맞추어 눈높이에서 격려해주는 것... 그것은 정말 신앙과 인격이 높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5. 내 눈이 높으며...


'저는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대부분의 중,고등학생들이 그렇듯이 저도 예배보다는 교제에 관심이 많아서 교회에 다녔고 잘난 척 하는 맛에 열심히 교회 일을 했습니다.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다른 목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목사가 되리라고 믿었고, 한때는 나 정도면 대교회를 목회하기에 손색이 없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제게 경천동지할 '회심'의 시간이 왔습니다...(p.197)


어쩌면 이리도 지난 날의 내 건방진 생각과 똑같을까.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신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직 경천동지할 회심을 지나지 않았다는 것. 나도 성경을 읽기전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예배보다는 교제가 좋아서 다녔고, 잘난 척 하는 맛에 열심히 교회 일을 하고... 대학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기독교인이 되리라고 믿었고... 거기까지 비슷했다. 아직 경천동지할 '회심'이 내게 왔는지는 모르겠다. 회심의 순간이 '점'이 아니라 '선'이라고 하는데, 그 선 위를 지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솔직한 이야기... 참 좋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금언처럼.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쉽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목사의 위치에 있으면 더더욱. 


6. 한 가지 의문


곽목사님이 겪은 많은 고민 끝에 나온 설교집인 이 책에서, 내가 세상과 기독교 사이에서 했던 많은 고민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관점이다. 모든 종교는 진리의 일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다르더라도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의문이 든 것은, 예수가 한 이 말씀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요즘 유행하는 종교다원주위를 (부분적으로는 인정할지는 몰라도) 본질적 부분에서는 정면으로 대조되는 말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곽 목사님은 이 말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고등)종교가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서로 다른 형태의 종교라며, 서로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이 책이 쓰여졌다.


그런데 예수의 '나 외에는 길이 없다'는 선언은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명쾌한 해석은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모두가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자 라고 결론 내리기에는, 예수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것 같기에 충분한 해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나만의 이해 방법으로는, 한 분 뿐인 아버지(하나님)을 소개해주는 혹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해주는 여러 다른 존재(타종교)가 있는 것이리라, 라고 생각해보긴 하였는데, 아마 오랜기간동안 신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결론을 내린 여러가지 결론이 있긴 있을 것이다. 그 여러가지 결론을 누군가가 다 설명해주겠다고 하면 거절할 것 같다. 솔직히, 조금 애매하지만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