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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책] 하나님의 뜻, 제럴드 싯처



하나님의 뜻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증보판 연구문제수록)

저자
제럴드 L 싯처 지음
출판사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4-08-16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바른 시각을 제시한 책. 새로운 희망과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역시 20대 초반에 읽었던 책을, 지난주에 다시 읽었다. 이제는 좋은 책의 기준을 조금 알 것 같다. 좋은 책이란, 마치 샘물에서 계속 새로운 물이 솟아나듯이 읽을 때마다 삶의 지혜와 통찰을 배우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 역시 '좋은 책'이다.


1. 하나님의 뜻?


사실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다섯 글자속에, 그동안 내가 갖고 싶고 하고 싶은 많은 욕심들을 꾸역꾸역 집어넣어놓고 겉포장만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아직도 갈 길이 멀겠지만) 이 다섯글자 속에 치밀하게 숨겨진 내 욕심을, 잘 보이지 않더라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알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글자로 쓸 때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적어 놓고 읽기는 '내 욕심의 끝'이라고 읽게 되기 때문이다.


제럴드 싯처는 성공(?)한 목사요 신학대학 교수였다. 그런데 40대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 어머니를 잃는다... 삶을 지속할 의미를 잃어버린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이런 고통이 일어나지 않기를 절대적으로 바라지만,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삶을 지속할 의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자신없다. 사실 누가 이런 고통에 대해 잘 극복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책과 설교 혹은 강의를 통해,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도 않은 고통에 대해 '다 잘될 것이다' '극복하면 된다'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어쩌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언젠가는 마주쳐야하는-그것이 비록 조금 빠르거나 늦은 차이는 있지만- 죽음을 생각할 때와 같이 고민스러운, 그리고 고통스러운 주제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삶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이든 친구든 건강이든 직업이든 재산이든 물건이든간에, 크고 작은 죽음을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통스러운 일, 저자의 경우처럼 사랑하는 가족 세 명을 한 날에 잃게 되는 고통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찾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비극이 일어나게 그냥 두실 수 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소중한 우리 가족 세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마치 재수없이 길을 건너가던 개미 세 마리를 아무 생각 없이 눌러 죽인 어린아이라도 되는 양 그것은 내게 낭비요 무의미한 사건처럼 보인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아니 일어나야 했는지 아직도 나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그후 몇 달 동안 그 비극에서 일말의 의미라도 찾아보려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일이 떠오른다. 나는 그 사건을 나의 인간경험 내에서 바라보았다......결국 나는 내 시야가 자신의 유한성 때문에 흐려져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나는 내가 내린 쉬운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시인했다......그래서 나는 그 사건이 내게 아무리 불가해하고 신비로워 보였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셨다고 믿기로 천천히 조심스레 결단했다. 성경의 다른 많은 기사들과 아울러 요셉의 이야기가 도움이 됐다......

그래서 나는 모호한 것을 알아내려 하지 않고 명확한 것을 행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을 믿어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내가 선택을 잘못 내리면 잃을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희망 속에 살면서 자녀들에게 사랑을 쏟았다. 내 인생의 노선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이루는 쪽으로 정했다.......나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어 행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리라 어림짐작만 할 뿐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신비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 그 결단이 내 삶을 구했다.(p.181-2)


이런 고민앞에서, 지금의 나처럼 내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서 종교를 이용하고자, '하나님의 뜻'이라 적어놓고 '내 욕심의 끝'이라고 해석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건방진 것이었다. 사람이 욕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욕심을 위해 종교를 통채로 희생해 욕심을 이루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처음에는 자신의 필요와 욕심을 위해 종교를 찾을 수 있지만-때로는 그것이 종교를 찾게 만드는 '은혜'가 되기도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의 본질에 발을 담그지도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종교의 본질을 누리는 진실된 기쁨을 모르게 되니, 스스로에게 불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책을 읽다가 이 부분을 접하고서는 잠시 책을 덮었다. 그냥 읽어내려가지 못했다. 엄청난 고난을 겪고 극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에 대한 경이로움과 더불어, 그 생각을 고난을 겪고 배울 마음은 전혀 없이 몇 페이지의 글자를 통해서 배우고 싶은 내 건방진 마음이 동시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2.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광야에서 히브리 민족은 소극적 자유, 즉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이제 그들은 마음대로 살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적극적 자유, 즉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자유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 산에서 이 적극적 자유를 배웠다.(p.75)'


'예술가와 운동선수들은 이 참 자유의 본질을 잘 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엄격한 훈련을 감수하여 결국 예술과 운동 실력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p.80)'


소극적 자유, 즉 압제로부터의 자유는 정말 좋다. 그런데 적극적 자유, 즉 무언가 높은 가치에 기꺼이 복종할 수 있는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비교할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최고의 예술가와 운동선수들에게서도 적극적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용운 시인도 적극적 자유를 잘 알고 있었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한용운, '자유' 중에서-


제럴드 싯처도 적극적 자유를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살면서 만나는,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크고 작은 고통들, 그것은 언젠가 완전히 누릴 적극적 자유를 위한 준비라면...  적극적 자유를 위한 복종. 어쩌면 이것이 삶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스캇 펙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사랑을 정의함으로서, 다른 표현을 통해 적극적 자유를 표현했다.


3. 믿음


이런 적극적 자유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이후에 다르게 전개되어 갈 것이라는 기대, 설령 내 바램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고 그 또한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다 같은 말이다. 이러한 기대를 하나의 단어로 '믿음'이라고 한다. 


가까이에 보면 진료실에서 나를 '믿어'서 나의 진료를 받고 설명을 듣고, 처방받은 대로 약을 먹고 행동을 바꾸어주는 환자들... 내게 한 명 한 명이 정말 고맙다. 내 스스로의 헛점과 어리석음을 나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주고 내 설명과 지시대로 따라주는 환자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잘못된 처방으로 며칠 더 힘들게 보내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러기에 나를 믿고 따라주는 환자들이 정말 고맙다. 간혹 처방을 따랐는데도 증상이 심해지는 환자들이 있지만, 그들을 대할 때 나에게도 어느정도의 plan B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나를 믿고 따라준 환자들의 상당수는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의사로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뿐더러, 그들의 기대와 '믿음'이 있기에 내 실력을 높이고자 스스로 노력하게 되고, 내 능력을 벗어난 환자에게는 나의 어설픈 처방이 그들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보다 경험많고 실력 있는 의사에게 기꺼이 보내게 된다. 진료를 하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비로소 깊이 느낀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나를 전혀 믿지 않으면서 진료실에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한 것이 나의 첫번째 잘못이지만, 같은 설명을 듣고도 나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치료를 해 줄 방도가 없다. 대부분은 나를 한 번 간 보듯이 왔다가 다시 오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내 처방을 따르지 않고 약도 먹이지 않는데 꾸준히 다니는 경우도 있다. 의사입장에서는 그런 환자들이 제일 힘들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의사를 믿는데는 큰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처방받은 약을 '입으로 먹는' 정도의 믿음만 있으면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니 '겨자씨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예수를 믿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이전부터 믿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결정은 모조리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했던 것들을, 당장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려울지라도 조금씩 예수를 믿고 기대하기로 했다. 그것은 의사가 처방받은 약이 적어도 내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만큼이다. 


4. 네가 말하는 기독교 신자가 너 같은 사람이라면 난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저자는 대학생 때 그리스도인이 되고, 전도하고 싶은 열정이 가득했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네가 말하는 기독교 신자가 너 같은 사람이라면 난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저자는 그 부분에 대해 회상하며 이렇게 겸손히 받아들인다. '지금도 나는 그리스도인의 열정으로 위장되었던 내 교만과 비판적 태도를 후회한다(p.230)'


어두울수록 어둠이 드러나지 않고, 빛이 가득하여 밝아질수록 아무리 작은 어두움이라도 쉽게 드러난다고 했던가. 살면서 어쩔 수 없었던 소소한 자신의 잘못들을 크게 느끼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 것이고, 타인에게 큰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주고 나서도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거나 심지어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는 '사람이 정말로 괴로운 것은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나는 지난 35년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을까.


5. 평생을 두고 가까이 할 책


이제는 남은 삶동안 새로운 책을 많이 읽으려 노력하기보다는, 그동안 발견한 좋은 책들을 여러 번 읽으며 같은 내용을 다시 곱씹으며 생각하며 읽으려고 한다. 특히 몇몇의 저자들을 깊이 존경하는데, 김영봉 목사님, C.S.Lewis, 블레즈 파스칼, 헨리 나우웬이 그러하다. 그리고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도 빼놓을 수 없고 이번에 두 번째 읽은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도 목록에 포함시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