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

영화 컨택트 감상문(스포일러 많음)

*** 스포일러가 많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비와의 조우, 컨택트>  영화 Arrival 컨택트 감상후기


'문과생들의 인터스텔라'라고도 하는 영화 컨택트 Arrival. 영화 인터스텔라를 매우 흥미롭게 감상했던 나는, 그 표현을 어디선가 보고서 이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Arrival인데, 한국에서 개봉할때는 '컨택트'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이름을 바꾼 연유가 어떤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고 난후에는 어떤 제목을 붙였더라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낯선 존재(외계인?)가 도착했다(Arrival)는 의미이든 혹은 낯선 존재와의 접촉(컨택트)이라는 의미이든, 의미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표현하는 글자만 다를 뿐. 그러나 영화를 보기전, 영화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제목이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Arrival'인지 '컨택트'에 따라, 어쩌면 영화가 대중에 주는 느낌이 다르고 매출도 다를수 있어서, 영화의 이름을 바꾸어 개봉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 느낌 등을 표현하지만, 같은 언어, 심지어 같은 낱말을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가 사람마다 다른 경우가 많다.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경우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경우에 다르다. 마치 소나무는 언뜻 보면 소나무인줄 알 수 있는 특징이 있지만, 각각의 소나무는 모양, 색깔, 나이 등 모든것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와 진심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언뜻 매우 쉬워보이지만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때로는 의식의 차원을 넘어선 신비스러운 일이기까지도 하다.


영화는 세계 곳곳에 낯선 비행물체가 출현하면서 시작한다. 12개의 거대한 검은 비행물체가 출현하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그들의 삶에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평소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무언가를 열렬히 믿어왔을 사람들은 집단자살을 한다. 많은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쫓겨 생필품을 사재기하기도 한다. 국가도 큰 혼란에 빠진다. 일부 국가는 정체모를 검은 물체가 인류를 해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공격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한 것은, 검은 비행물체가 출현한 것 밖에 없다. 위협스러워 보였는지는 몰라도,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영화가 실화가 아니라면 작가의 상상 속에서 그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즉, 사람의 마음속에서 떠오른 이야기라면 심리학으로 설명을 해도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검은색 비행물체,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낯선 외계인은, 사람이 알지 못하던 존재 즉 무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던 것은 익숙하고 편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에는 처음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이 너무 클 때는, 낯선 존재와의 그 어떤 소통도 거부하고 할수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파괴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영화에서도, 외계인(헵타포드라고 부르는)과 접촉해보려는 사람들은 방호복을 입고 백신을 맞는 등 가능한 모든 방어도구를 사용한 채, 알수없는 세균으로부터의 '감염'을 예방할 태세를 갖춘 후에 접촉을 시도해본다. 사람의 삶도 비슷하다. 나와 다른 낯선 세계에 처음 들어갈 때, 내가 보유한 가능한 모든 보호도구를 사용해서, 그것이 지식이든 종교든 돈이든간에, 감염을 예방한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로부터 감염되지 않기 위해 때로는 역사의 경험을 뒤적이고, 논리를 만들고, 정치후원금을 받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인다.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불교로부터 감염되지 않기 위해 무언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그 권위가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는 것 같다. 과거에는 교황의 말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것 같고, 중세를 지나 현대를 향하는 언젠가부터는 성경 속 문자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과거에는 파문이라는, 현대에는 이단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온 것으로 보인다. 비단 기독교인 뿐 아니라, 불교든 이슬람이든 혹은 그 어떤 종교를 가졌든 간에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어느 시기에는 그렇게 타종교로부터 감염되지 않기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실생활에서도, 낯선 존재에게 손을 내밀고 접촉을 해보려는 것은 언제나 여성성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남성성은 따뜻하게 접촉하는 법을 도무지 알지 못하고, 무기를 동원해 두려움을 파괴시켜 버리는 방법만 고민한다. 때로는 고민도 안한다. 영화속에서, 대부분이 남자로 이루어진 군대는 적을 궤멸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지만, 유일한 여성인 루이스는 어떻게 접촉하고 어떻게 소통할지를 고민한다. 온갖 보호장구를 착용한채 외계인(헵타포드)과 소통해보려고 시도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여주인공 루이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호복을 벗어버린다.


그러자 놀랍게도, 우려했던 감염은 일어나지 않고, 헵타포드와 소통하게 된다. 그렇다. 두려움을 주는 낯선 존재로부터 나를 옭아매는 것은, 내가 기존에 입고 있던, 나를 보호해준다고 믿고 있었던 것(페르조나)이다. 그것을 벗을 때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지고, 자신이 누군지를 그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낯선 존재, 낯선 사상, 낯선 삶의 방식에 두려워하여 기존의 나를 벗어버리지 못한다. 기존의 나를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주위 상황에 의해 어쩔수 없이 이루어지게 되는 일이며, 스스로 자신을 탈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벗을 때, 자기 자신도 모르던(무의식 속에 있던) 솔직한 모습을 보게 되고,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 물론 보호복을 벗지 못한 사람들은, 보호복이 자신을 지켜주기에 자유롭다고 말하기도 한다. 언어로 보면 같은 '자유'이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한쪽은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린 자유이고, 한쪽은 거추장스런 옷안에 갖힌 자유이다. 종교의 측면에서 보면 전자는 신비주의자들인 것 같고, 후자는 근본주의자인 것 같다. 물론 모든 신비주의자들도 옷을 벗기위해 그전에 옷을 입어야만 했다. 다만 옷입고 있던 그 상황이 답답해서 벗어버렸을 뿐이다.


<우로보로스, 꼬리를 무는 뱀의 형상, 영화속 헵타포드어와 비슷하다>


헵타포드와의 소통의 방법은 말소리가 아닌 그림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루이스는 헵타포드와 그림으로 소통하기는 하지만, 고도의 지적 작업을 필요로 하기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다 영화속에서 아주 잠깐, 헵타포드와 직접 접촉(contact)하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그 순간 헵타포드는 수많은 의미가 담긴, 이루 다 해석할 수 없는 그림을 표현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림으로도 보여주기에도 충분치 않은 그것은 아마도, 느낌일 것이다. 루이스는 헵타포드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보면 어느 고전에서인가 나오는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뒤에 한문장을 덧붙여야 된다.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경험하는 것(느끼는 것)이 낫다'고. 또 어느 동양철학인지 동양종교에서는 같은 사실을 '불립문자'라고 표현한 것 같다. 


두려움을 견디다 못한 일부 국가는 헵타포드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을 파괴시키려 한다. 그 순간 루이스는 꿈인지 환상인지 모르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는 전 지구적 위기로까지도 번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환상의 도움을 받아 전지구에 닥친 긴장의 응어리는 소멸되고, 인류는 화합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환상같은 경험으로 등장했다. 아마도 고대인들에게는 일상속에 환상같은 경험이 혼재해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자처럼, 내가 장자인지 나비인지 알수 없는, 두개의 독립된 세계가 동시에 하나로 통합되어 존재하는 경험을 하며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인에게 그러한 환상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등장하는 것 같지만, 가장 진실되게 등장하는 방법은 꿈이다. 꿈 속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결국 미약한 존재인 인간을 보완해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직 꿈의 세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언어'가 이해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루이스가 경험했던 환상의 세계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꿈의 세계 혹은 무의식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고, 경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그 세계에서는 시간이 의식의 세계처럼 순차적으로, 직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not linear). 과거, 현재, 미래로 존재하는 의식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직선을 따라 흐르기에 시간을 거스를 수 없지만, 무의식에서의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기에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 마치 소설책을 읽을 때 미래의 내용이 궁금하면 건너뛰어 읽거나, 읽은 내용이 기억안나면 되돌아가 다시 읽듯이 말이다. 환상을 경험한 루이스는, 인류에게 팽배한 긴장을 풀기 위해 환상을 통해 미래를 본다. 그것이 의식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환상을 통해 미래에 자신이 쓰게 될, 아니 미래의 자신이 써놓은 '우주의 언어'라는 책을 읽고 헵타포드와의 소통에 이용하고, 전쟁 직전의 상황에서는 자신에게 다가온 환상 속 인물이 알려준 해결책을 따라함으로서 인류의 긴장을 풀어준다. 


모든 긴장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헵타포드와 소통하며 인류에게 다가온 긴장을 풀어준 두 남녀 영웅 루이스와 이안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먼저 떠났던 아이를 다시 갖게 된다. 아이를 떠나보냈던 깊은 슬픔은, 이제 다시 만날 기쁨이 되어 다가온다. 영화속 이야기처럼, 내게 슬픔을 안겨줬던 이별들은 언젠가 그만큼의 기쁨이 되어 미래에 다시 다가오게 될까. 그렇게 되면 좋겠다. 슬픔의 뒷면에는 기쁨이, 기쁨의 뒷면에는 슬픔이 있는 것일까. 삶이란 어쩌면 슬픔과 기쁨이라는 앞뒷면을 가진 길다란 편지지에, 자신만의 이야기 한편을 써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사는 현재란 과연 무엇일까. 과거는 지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에 분명히 경험했던 일이 현재에 다시 경험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미래가 되는 것은 아닐까. 현재를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붙잡혀 평생을 사는 것처럼도 보인다. 어릴 때 받았던 상처, 혹은 젊은 시절 해보지 못했던 경험 같은 것에 평생 사로잡혀 일생을 보내는 것 같다. 또 어떤 이들은 미래에 붙잡혀 평생을 사는 것 같은 사람들도 있다. 미래의 생존을 위해 오늘을 허비하고, 이미 충분한 소유물을 가졌음에도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채워보려 오늘도 열심히 자신을 잊고 남이 만들어놓은 가치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 그들은 현재를 사는 것일까 미래를 사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에 사로잡힌 현재를 사는 것일까. 이렇게 글을 쓰는 나는, 과연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삶이란 알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 알수 없는 것들을 한 단어로 요약해서 '신비롭다'고 표현하고 싶다. 물론 '신비'라는 두글자는 신비로운 그 세계를 모두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냥 느낌만 전해줄 뿐이다. 어쩌면 느낌이 전부일 수도 있다.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도 더하루 펜션  (0) 2017.04.25
일상  (0) 2017.04.25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0) 2017.02.05
강화도 (3)- 썰매  (0) 2017.02.03
강화도 (2) - 눈사람  (0) 2017.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