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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내 생각

유년시절의 기억-개인생활사 1부

개인생활사 1부.

 

스타워즈로 치면 1,2,3편에 해당.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얘기.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미래의 이야기로 해석될 수도 있음.

융연구원 지원서에 쓸 당시에는 들여다보지 않았던, 의식 이전의 개인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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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982~4), 뜨거운 화로에 목을 데었다. 어렴풋한 기억인데, 밥솥만한 화로와 뜨거운 숯불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내가 말이 늦고 '아옵아옵' 소리만 낸다고 해서, 나를 보며 웃으며 '아옵아옵'이라고 부르곤 했다.

 두가지 기억이 아마도 제일 오래된 기억인  하다. 나는 어렸을  말이 늦게 트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30~36개월이었을 것이다.

 

6세경 아버지가 축사 옆에 수도관공사를 하는데 땅을 파는 일을 내게 시켰다.  기대를 안하셨던  같고, 아버지는 옆에서 다른일을 하셨다. 나는  허리정도 들어갈 깊이로 50cm~ 1m정도의 흙을 팠다. 아버지가 보고 놀라셨다.

아버지가 뒷산에 땔감으로 쓰려고 자주 나무를 하러 가셨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서 쓰러뜨린  톱질을 내게 시켰는데, 내가 낑낑대면서 절반 가량을 톱질했다. 역시 아버지가 보고 놀라셨다.

그무렵 마당이 있던 집에서, 작은 플라스틱 트럭 장난감으로 흙장난을 자주 하였다. 공사현장에서 흙을 실어 나르는 상황극 놀이를 혼자 자주 했다. 하루는 유착기 부품이 신기하게 생겨 갖고 놀겠다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 갖고 놀다가, 나만 아는 장소(장독대 뚜껑) 밑에 숨겨 두었다. 얼마후 아버지가 찾아서 다시 갖다 드렸는데,  없앴냐고(아무데나 두었냐고) 혼났다.

집근처 모래밭에서 이웃집 OO 하루종일 놀다가 저녁늦게 밥먹으라는 소리를 듣고서야 집에 들어오곤 하였다. 매일 재밌게 놀던 OO 멀리 '원당'인가 '철산'인가 하는 곳으로 이사간다고 했다. 슬펐다. 매일같이 놀던 친구가 이사간다고 해서 슬펐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친구가 이사간 곳을 찾아가고 싶었다.

할머니가 성경책을 더듬더듬 읽는 장면이 떠오른다. 옆에서 나는 (문학의 형태로 발간된) 구약이야기를 읽었다. 어떤 날은 할머니 옆에서 신약성경 복음서를 여러장 읽었다. 마태복음 한권을  읽었던  같다. 한두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할머니가 대견하다고 했다. 그때 생각하면  정겨운 느낌이다. 그래서 간혹, 나도 아이들과 이불덮고  읽어주거나, 자기전에 이런 저런 일상적인 얘기를 하면 즐겁다. 아이들도 좋아하는  같다. 실제로는  마음이 분주해서 누워있다가도 애들이 얼른 잠들기만을 바랄 때도 있는데, 그런 분주함에 사로잡힌 나도 내가 싫다. 아이들도 얘기해주는 아빠를 훨씬 좋아할텐데, 그게  어렵다...

 

집과 뒷산에서 구한 나무로 못질을 해서 나무칼을 만들고, 대나무에 나일론 끈을 묶어 활을 만들어 놀곤 하였다. 조악하게 만든 장난감총, 장난감칼이었지만 그런 의식없이  자체로 재미있었다. 어른이  후에 훨씬 세련된 물건들을 많이 쓰고 있지만, 그때같은 의미를 주었던 물건은 많지 않다.

 

외할아버지 제사나 외갓집 행사가 있어 갔다 올때, 집에 차가 없었기에 포니 택시를 타고 공촌동 입구(버스정류장)까지 와서 내리곤 했다. 그러고는 한참을 걸어서 집에 갔다. 택시에서 내려서도 15분은 걸어야 되는데,  택시를 타고  근처까지 가지 않는지 이해가 안되었다. 택시기사를 지나치게 배려한  했다.

 

8-13(1986~91)경은 초등학교 다닐때이다. 초등학교 처음 입학하던 날이 생각이 난다. 노란색 비닐 잠바를 입었었다. 등교할때 반은 버스타고, 반은 걸어다녔던  같다. 걷기만 하면 편도 30분걸리는 거리인데, 버스타면 버스 기다리기 15, 버스타는 시간 5, 내려서 걷기 15  35분은 걸렸을 것이다. 버스 5분거리는 한정거장이었는데,  정거장 같은 한정거장 이었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걷기에는 부담스런 거리이긴 했다. 버스도 20-30분씩 기다릴 때가 많아서, 때로는 걸을때보다도 오래걸렸다. 그래서 걷기싫은 날이 아니면 웬만하면 걸어다녔다. 당시 나는, 버스정류장에 언제 버스 도착한다고 미리 알려주면  좋겠다...싶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 기다릴지 걸을지 고민안해도 되니까. 몇년전인 2010 경부터 그런 서비스가 이루어진  같다.

 

가장 최악이던게, 버스를 20여분 기다리다가 버스가 안와서 포기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걸어가고 200m 가니 그렇게도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나를 지나쳐갈때였다. 그때 좌절감은 상당했었다. 그래도 겪을  밖에 없었다. 중학교는  멀리 배정을 받아서 버스를 30분정도 탔는데, 그때부터는 버스 기다리는 괴로움만 겪으면 되었다. 걸어가는 옵션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버스비가 당시 70~100원가량 했는데, 버스비를 몇번 아끼면 300원짜리 ‘치토스 사먹을  있었다. 버스비를 아껴 과자를 사먹으며 걸어오는게  좋았다. 그러고 보니 버스비가 10배이상 오르는 동안 과자값은 2 정도밖에 안오른  같다. 물론 질소의 양도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과자회사가 ‘질소를 비싸게 판다 조롱섞인 농담을 하지만, 과자회사입장에서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만도 하겠다. 남들 월급 10 오를때 2배오르면 나라도 짜증날 . 짜장면은 당시 700원으로 기억나는데, 요즘은 4-5천원 하는  같다. 간혹 2900원하는 짜장집도 있던데. 경영이 상당히 어려울  같다. 미끼상품일수도 있겠지만.

 

구슬치기를 자주 했다. 집에서 유리구슬로 했고, 학교에서는 유리구슬도 했고 인근 골프장에서 밖으로 날아온 골프공을 주워다가 하기도 했다. 구슬치기는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구슬로 다른 구슬을 정통으로 맞혀서 멀리 보낼때의 쾌감이 대단했다. 비스듬한 면에서 구슬을 굴려서 누구의 구슬이 멀리가는지도 했던  같은데, 조마조마하게 굴러가는 구슬을 보던 것도 재밌던  같다.

비석치기(망까기) 자주 했다. 네모난 나무조각을 던져놓고, 몇번의 도움닫기를 하여 나무조각을한 발로 밟고, 나무를 던져 표적을 쓰러뜨리는 놀이인데 정말 재밌었다. 그렇게 즐겁게  적이 성인기에는 거의 없던  같다.

 

부모님이 이웃집 OO아저씨네 집에 자주 놀러가셨다. 나도 자주 따라갔다.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는 어른들 뒤에서 피곤해서 자기도 했다. 20m 떨어진 옆집이었는데, 밤에 혼자 가는  무서워해서  갔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그랬던  같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일하셨는데, 일하다가 힘들면 어머니와 같이 삼겹살에 김치를 구우면서 소주  잔을 하시곤 했다. 그때 건축자재였던 무슨 판에 구워 기름이  빠지고 노릇노릇해진 삼겹살을 자주 드셨다. 가끔 옆에 있던 나도 먹곤 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그렇게 맛있는 고기를 여태 먹어보지 못했다. 겨울에는 굴을  자루 사와서 집에서 구워먹기도 하셨다. 시골이라 가능했지만, 시골은 시골 나름의 운치와 자유가 정말 많다. 그리고 그런 운치와 자유가  그립다. 사춘기 이후 20여년은 그런 시골생활에서 벗어나는게 삶의 목표였지만.

 

야구를 자주 했다. 10, 11 경이었다. O초교 작은 운동장에서 테니스공으로, 굴러다니는 강목을 구해서 야구배트로 쓰고, 학교모자를 야구글러브로 썼다. OO 홈런타자였다. OO 야구할 때면, 그의 표정에서는  자신감이 묻어나오곤 하였다. 나는 잘하지는 못했으나,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잘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가 잘하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내가 못한다고 별로 괴롭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 질투를 안한다는 것은 수많은 마음다짐과 자기성찰, 혹은 깊은 고통 후에야 얻게되는 것인데, 초등학교까지는 질투가 별로 없었던  같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예수의 말씀은, 아마도 그런 순수한 마음을 의미하는  같다.  마음은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그즈음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남들이 나보다 잘하고 많이 가지고 있고 잘생겼고 조건이 좋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같다.

야구하다가 테니스공이 인근 풀밭으로 날아가버리면 한참을 찾기도 했다. 간혹 친구들중에 누군가 용돈을 두둑히(2~3천원) 가지고 있는데, 기꺼이  돈을 테니스공 사는데에 지불하는 날이면, 공찾는 것으로 인한 시간을 많이 아낄수 있었다. 누가 홈런성 파울이라도 치는 때이면 야구는 풀이나 숲으로 날아간 공을 찾느라 2~30분간 중단되기 때문이었다. 하나에 500원쯤 하던 테니스공을 3~4개정도 구입해서 야구를 시작하면, 중간에 공이 밖으로 날아가도 대략 위치만 기억하고 있다가 야구가 끝난 후에 찾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려면 기꺼이 1~2천원정도 손실을 감수할  있는 부자가 우리들 중에 있어야 했기에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초등학생수준에서 수비는 사실상 한참 굴러가서 저절로 멈춘 공을 줍는 것과, 하늘 높이(그래야 10미터정도)   받는  정도밖에 없었다.  공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서, 간혹 누군가 플라이볼을 실패없이 잡아낸다면 그는 주위 아이들의 ‘~~’하는 환호성과 함께 영광을 받을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 도루는 금지되어 있었다. 발이 아무리 느려도 일단 뛰기 시작하면 100% 성공일  아니라, 행여 투수가 겉멋이라도 들어 견제라고 하는 순간에는  견제구는 1루수의 2m   공간으로 지나가게 되므로 당연히 놓치게 되어 1루주자는 홈까지 들어오게 때문이었다. 그러면 안타는  그라운드홈런(1득점) 되며, 수비하는 사람들은 깊은 실망감에 젖게 된다. 간혹 제멋에 견제구를  던졌냐부터 시작해서, 너는 그것도 못받냐 하는 논쟁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면 팽팽한 긴장을 느껴야 하는 스포츠가 같은 편에서 내분이 일어나 실망과 질책으로 망쳐버리는 일도 있었다. 야구는 공격과 수비가 교대로 이루어지는 경기라서, 수비하는 상대방의 깊은 실망감은 잠시후  편의 실망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야구를 시작하기전에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외치고 시작하곤 했다. ‘도루 없음!’    그럼에도 1루주자가  아이는, 마치 당대의 야구선수 김재박이라도   언제라도 도루를  듯이 슬금슬금  자세를 잡곤 하였다. 그러면 수비팀중에 불안한 누군가는 한번  외친다. ‘! 도루 없어!’

 

당시  우상은 해태타이거즈 이강철 선수였다. 그당시 흔하지 않던 잠수함 투수였고, 뱀처럼 부드러운 투구폼이 그렇게 멋질수가 없었다. 당시 최고의 선수이던 선동열선수도 훌륭했지만, 독특하고 부드러운 폼으로 뛰어난 실력을 보이던 이강철 선수가 마냥 좋았다. 작은 체격의 나는 학교 창고건물 벽을 향해, 마치 이강철투수라도  듯이 몇번이고 공을 던지곤 하였다. 잠시 장래희망으로 야구선수를 꿈꾸기도 했으나, 웬지 야구선수는 일하는  아니라 돈을 못벌것 같았다.  체격이 작은 것도 운동선수가 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아버지가 제대로  야구배트와 글러브를 선물로 사주셨다. 좋긴 했으나, 실제로 야구할 때는 또래 친구들과 같이 학교모자를 글러브로, 굴러다니는 나무 막대를 야구배트로 사용하는게  재미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요즘 아이들이 깨끗한 운동장에서 시간 정해져있는 스포츠센터에서 지시에 의해 운동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을지 모르겠다. 이것을 재미없어 불쌍하다고만 한다면 또하나의 꼰대가 되려나. 아무튼 요새 아이들도 재미를 느끼며 살게 되면 좋겠다.

집에서는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나는 스포츠면 기사는 매일 정독을 했다. 야구시즌중에는 팀의 순위, 타율, 방어율 같은 주요 통계가 같이 기사로 실렸는데, 그러면 표의 숫자-타율 0.328, 방어울 2.91같은-까지도 정독했다. 아마 그런 성향이 어른이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Excel 지금  쓰고 있는  하다. 사람들중에는 Excel, PPT 매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은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탁구를 처음  것도 초등학교 3-4학년이었다. 처음엔 동네 성당에 있는 탁구장에 가서 몇번 쳤는데, 신부님에게 주의를   들었다. 그보다도 교회다니는 내가 성당에 와서 쳐도 되는가 싶은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교회탁구장은 일요일에는 어른들이 주로 탁구를 쳐서,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틈에  수가 없었다. 간혹 아주 잘치는 또래형들은 어른들의 부름을 받아 일원이 되어 탁구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또래중에서는 탁구를  치는 편이었다. 한살위에 OO형이 있었는데,  형은 나보다 훨씬  쳤다. 사실  형은 나보다 잘치지 않았는데, 4학년인가 5학년인가 겨울방학에 나와 매일 탁구를 치자고 제의를 해서, 매일 오전 10시경 교회탁구장으로 출근하기를 두어달 했다. 내가 연습상대가 되어준 덕택인지  형은 한달만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이후 중학교때까지도 탁구장은 즐겨찾던 곳이었다.

 

농구를 처음 시작한 것도 초등학교였다. 키가 작았지만 나는 농구가 좋았다. 바람빠진 고무 농구공이 집에 있었는데, 근처 고등학교 농구장에 가서 혼자 농구를 했다. 그즈음 나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있었다. 혼자 운동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기 시작한게 그무렵이었던  같다. 여럿이 하는 운동도 재미있지만, 혼자서 골대에 공을 던지고, 아무도 없는 농구장에서 말없이 한두시간 운동하다 쉬다가를 반복하면, 긴장이 많이 풀렸다. 몸이 중학교, 고등학교, 교회에 있을 때에는 또래 친구들과 같이 농구를 하기도 했지만, 집에 혼자 있을때는 농구공을 들고 근처 서인천고에 가서 두시간씩 운동하고 왔다. 몸이 운동을  동안, 나의 정신은 혼자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했던  같다. 그즈음부터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쯤 이미 나는 사춘기가 되어 있었다. 혼자하는 농구를 가장 즐겼던 시기는 2, 3이었는데, 나는 그당시 느꼈던 공부, 입시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렇게 풀었던  같다.

 

초등학생때 축구도 좋아하기는 했지만, 너무 사람이 많았다. 시장통같은데서 뛰어다니며  하나를 좇는 것은 별로 매력이 없었다. 간혹 풋살처럼 적은 인원이 축구를 하면 재미있었다. 친척동생 OO 1:1 축구를  것도 중학생때였다. 인근 대인고에서  넓은 운동장에 둘이서 1:1 했는데, 수비 한번을 못하면 곧바로 실점이었다. OO 나보다 운동신경이 뛰어났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내가 졌다. 그래도 매일 저녁 한시간 이상씩 축구를 했다.  

 

교회는 항상 운동을 하던 공동체였다. 축구, 농구, 탁구를 모두 거기서 처음 배웠다. 주말이면 예배시간 빼고는 운동을 많이 했고, 방학때는 평일에도 했다. 지금 나이 40 도착해서 30여전전을 뒤돌아보니, (심리학적으로 볼때에도) 구기종목을 여러사람들과 함께 했던  것이 삶의 긴장을 풀어주는, 아주 중요한 의식(ritual)이었던  같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새뱃돈을 받아서 당시 TV에서 방영되던 만화 ‘제타로봇장난감을 샀다.  장난감은 어른이 되어 찾아보니 볼품없는 초라하고 간단한 장난감이었는데,  당시에는 나의 분신처럼 소중하게 여겨졌었다. 무언가 말로 표현할  없는,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느낌은 사춘기가 되면서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어른이  지금은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고급 전자제품이나 고급차에서 비슷한  느끼려는  같다. 그래도 그당시 제타로보트 장난감이 주던 신비스러운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지 못한다.  ‘느낌 어디로  것일까.

 

나는 장난감 조립을 재미있어했다. 용돈이 생기면 문방구에서 100, 200 간혹 500원짜리 장난감 조립하는 것을 사서 시간가는  모르고 조립했다. 할머니는  쓸데 없는데다 돈을 쓰냐며 잔소리를 많이 하셨지만, 당시의 나도 그랬고 지금의 나도 그렇고 전혀 쓸데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고싶은 것을 하는 , 그것보다 의미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초등학교 자연(과학)시간에 학교  밭에 가서 식물을 관찰하고 보고서같은 것을 쓰라고 했던 수업이 생각난다. 나는 식물을 잘라 단면 그림을 그리고, 내가 관찰한 사실을 짧게 적었다. 쓰면서도 이게 무슨 특별한  있나 싶었다. 역시 내가 제출한 과제도 선생님의 아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의미없이 지나가버린 일이 되었다.

2학년인가 3학년에, 시험을 봐서 성적이 안좋으면 다같이 매를 맞는다는 얘기가 돌았다. 선생님에게 직접 들은 얘기는 아녔던  같고, 또래 아이들 사이에 들리는 얘기였다.  얘기로 한참을 무서워했다. 다행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간  같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일기를 써서 숙제로  , 하도 일기 쓸게 없던 적이 있었다. 사실 일기 쓰는게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하루는 제목을 ‘ILGI (일기)’라고 붙이고, ‘쓸게 너무 없고 귀찮은데 선생님이 일기쓰라고 하신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은 ILGI.’ 이런 식의 일기를 써서 제출했다. 당시 20대였을 OO선생님은 그게 재미있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제출했던 일기중에 가장 재미있고 긍정적인 선생님의 소감이 적혀있었다.

5학년쯤같다. 학교 선생님이 나에게 ‘동인천에 있는 OOO교육관을 몇월 몇일에 가야 된다 얘기하셨다. 가본적이 없는   곳을 혼자 가야 되는데, 당일이 되면 너무 불안할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 한명을 꼬셔서 일요일에 버스를 타고 둘이 가보기로 했다. ‘동인천 적힌 버스를 타고 한참 자다가 깨어서 ‘동인천 내렸다. 그리고 대략의 위치를 확인한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 자다가 깨어서 집에 왔다. 얼마후에 선생님과 직접가게 되었던  같은데, 내가 굳이 미리 답사(?) 가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때의 나는 무슨 두려움에 미리 답사를 갔었던 것일까. 그것도 머나먼 동인천(버스로 1시간거리) 갔던 것일까. 아마 이름모를  때의 두려움이 지금도 살아 있어서,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려 하고 준비하고 공부하려 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  같다. 두려움 없이 다가오는 삶을 그대로 느낄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그날그날 떠오르는 태양을 새것처럼 반기고 햇빛의 따스함을 느끼며  수는 없는 걸까. 해가 몇시 몇분에 떠오르고 몇시 몇분에 지게  것이므로 무슨 무슨 준비를 해놔야겠다고, 끊임없이 준비만 하는 인생....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즈음  싹이 자라기 시작했던  같다.  씨앗은 아마도  부모님이나 조상에게서 전해져 왔겠지.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 배정을 받았다. 뭔가 공부를 미리 해야   같아, 서점에 가서 영어 수학 문제집 한권씩 샀다. 알파벳과 수학 약간을 혼자 공부했다. 그당시 스스로 했던 그정도의 공부만으로도 선행학습의 효과를 느꼈다.  시대가 그랬는지, 인천에서도 낙후된 동네라 그랬는지, 주위에 그렇게라도 공부해온 친구들이 별로 없던  같았다. 요즘 자라는 아이들은 지역에 따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원어민 수준 영어를 요구받는 아이들도 있는  같다. 사회가, 부모가 그것을 요구하니까 어쩔수 없겠지만..... 초등학교때 수많은 놀이를 했던  어린시절을 되돌아볼  요즘 아이들이 안되어보인다.  역시 어떤 면에서는 놀면서 살았고, 어떤 면에서는 무언가에 쫓기듯이 성취만을 향해 미래를 준비하며 살았다. 각각의 밝음과 어두움, 유익과 해로움이 있을 것이다. 어떤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