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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내 생각

내 인생의 신약시대

내 인생의 신약시대


구약이 끝나 신약을 기다리는 동안 실제 역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400년가량의 시간이 있던 것처럼, 내게도 교회를 정하지 못해서 혼란스러웠던 시간이 있었다. 대학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공동체를 전공의가 되면서부터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같이 하지 못했다가, 전공의를 마치고 다시 그 공동체로 돌아가려고 하던 때였다. 나는 학생때처럼 다시 돌아가면 될 줄 알았지만, 그동안 내가 변한 것인지 그 곳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자유주의성향이 너무 짙다'는 지적을 받고 그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이다. 내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다 포기하고 공동체에 같이 하거나, 아니면 서로를 위해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 공동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원하던 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사실때문에 한동안 혼란스러웠고, 이후에 지금 다니는 아름드리교회에 오게 되면서 내 인생의 신약시대는 비로소 시작된 것 같다. 사실 어느 교회라고 나쁘기만 하겠으며 어느 교회라고 좋기만 할까. 내게는 아름드리교회가 새로 마음을 정착할 교회가 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교회에서 상처받아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신앙을 버리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당시의 내게는 아름드리교회에 마음을 둘 수 있었던 것 뿐이다. 그리고 그당시 내가 마음둘 교회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은총'이었던 것이다.


4복음서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이후부터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없던 암흑의 시대가 끝나갈무렵 베들레헴 작은 마굿간에 한 아기가 태어나면서 신약이 시작되었듯이, 그 무렵부터 내 마음속에서도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새로운 의미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스캇 펙 박사의 표현을 빌자면 그 이전까지는 예수라는 신의 존재를 '하늘에 있는 자비로운 경찰관'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내가 위급할때 연락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경찰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위안을 받을 때도 있지만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어서 멀리 느껴졌었다. 실재로 존재하는지 회의가 들때도 많았다. 그러나 신에 대한 개념이 좀 달라지면서 신은 하늘에만 있을 필요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신(예수)은 나를 구원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구원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 것 같다. 이전에는 구원을 '죽어서 천국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러기에 믿음은 '죽어서 천국가는 티켓을 얻는 것'으로 여겼었다.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좀 더 다른, 엄밀히 말하면 추가된 의미가 있는데 구원은 '자기 자신의 단점, 어두운 부분, 인정하기 싫은 것을 자신의 것(또는 책임)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칼 융의 심리학과 종교 읽기' 독후감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바 있다. 그런 의미의 구원은 죽음 이후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중에 이루어지는 구원이다. 자신의 치부-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라고 하는 그것-를 인정하게 된다면, 인정하기 직전까지 느껴졌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물론 너무 큰 치부를 인정하려면 두려움이 너무 크기때문에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며, 어떤 치부(그림자)는 그것을 대면하는 순간 그것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때에 따라 그 공포가 너무 크다면 한동안 헤어날 수 없는 충격에 빠지거나 심하면 그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치부를 인정하게 되는데에 예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대학때 다니다가 떠나온 공동체에서 나를 '자유주의자'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나는 한참동안 억울해했다.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나는 그 분들이 보는 것처럼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몇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면서 내게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공동체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다. 내게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역설적으로도 나는 그 공동체에서 두려워했던 '자유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공동체에서 '자유주의자'를 왜 그리 두려워하는지도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내 안에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많다는 지적에, 30살의 나는 극렬히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았었는데, 35살쯤의 나는 어느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누가 내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일까.


결혼하고 한동안 나는 스스로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내의 의견은 "좋은 아빠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좋은 남편이라는 말에는 동의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좋은 남편이라고 했고, 아내는 (생각하는 만큼) 좋은 남편은 아닐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내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교적 최근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아내를 위해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부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문제는 좀 다른 측면에 있었다. 우선 지금까지 내가 알게된 내 어두운 부분은, 내 생각과 아내의 생각이 다를 때에 아내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말은 즉 내 생각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스스로 여겨왔던 것인데, 결혼후 몇년간 살면서 했던 경험들은 내 생각이 그리 뛰어나지 않을때가 많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반대로 아내의 의견이 훨씬 지혜로운 선택인 경우들이 있다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그랬을 것인데, 결혼 초기의 나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생각만큼 좋은 남편은 아니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누가 마음을 바꾸어준 것일까.

 

좋은 아빠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세상 다른 일들이 그렇듯이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다를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서 스스로 자기만의 생각을 하기 시작한 후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다를 수 있다. 스캇 펙 박사는 그의 책 <그리고 저 너머에>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악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했다. '나같은 부모가 어디있어'라고 부모 스스로 말하는 집의 자녀들이 더 힘들어하고, '나 같은 시어머니가 어디있어'라고 스스로 말하는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가 더 힘들어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많은 의사들이 치료에  어려움을 겪는 난치병에 대해 간혹 '이 병은 내가 발견한 명약으로 단기간에 씻은 듯이 깨끗이 나을수 있다'고 지나치게 자신하는 말을 듣고 그 말에 혹해서 돈과 시간을 버리고 때로는 건강까지도 상하는 경우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며, 정치인들 중에는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으니 나를 지지해달라'는 사람도 참 많다.  나는 결혼이후 한동안(항상은 아니다^^) '나같은 남편이 어디있어'라고 생각할때가 있었는데, 지금와보니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움은 모두 아내가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내 어두운 부분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빛이 없다면 어두운 부분은 어두워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1:5)'는 성경말씀은 당시 세상을 향한 말씀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내 어두움을 일부라도 보려면, 어두움에 빛이 들어와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빛이 신약성경에 등장한 예수이다. 마치 예수가 육신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나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기 시작한 것처럼, 예수는 내 마음속에 있는 어두운 부분(치부, 그림자)를 조금씩 비추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면서 2000년전 이스라엘 땅 어딘가에 33년간 육신으로 존재했던 예수는, 2016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라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존재하게 된 셈이다. 


이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4복음서에 해당하는 기간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이후에 펼쳐질 일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성경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상상해볼수는 있다. 4대복음을 지나면 바울이 쓴 서신이 여러권 등장한다. 나는 어떻게 살게 될까. 바울처럼 자신이 경험한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일을 하게 될까. 알수 없는 일이다.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요한 1서 4장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부터 시작하는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짦은 이야기는 사랑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해 알듯 모를 듯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어릴적부터 좋아하는 말씀이며, 그 알 듯 모를 듯 요한이 풀어준 신비로운 세계에 대해 예전부터 동경해왔다. 나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4복음서를 살아가면서 예수의 의미, 구원의 의미, 빛의 의미, 어둠의 의미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사랑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더 명확히 알게 되려면, 내 인생 또한 요한일서만큼 흘러야 되는 것 같다. 요한일서는 신약성경의 거의 끝부분이니, 지금의 나로서는 알듯 모를듯한게 정상일 것이며, 사랑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내가 사랑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면 그 때는 아마도 나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있을 것이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은 요한계시록이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온갖 비유로 쓰여진 이 책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마치 지구의 종말을 보는 듯한 두려움먼저 느끼게 된다. 그러나 상징으로 읽게 된다면 요한계시록은 전혀 다른 책이 된다. 마치 반지의 제왕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존한다고 생각하면 공포영화가 되지만, 절대반지를 향한 인간의 욕망의 관점으로 읽으면 재미있게 관람할 뿐 아니라 교훈을 얻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문자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구원받으려면 14만4천명 안에 들어야 되고, (우리 집단에서) 번호표도 뽑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들은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골룸이 마치 집 뒷산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 지도 모르겠다. 숫자 '666'이 로마시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네로황제 혹은 그와 유사한 인물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세의 구원티켓을 얻기위해 엉뚱한 숫자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요한은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 4:18)'라고 썼는데, 그들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대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고, 요한계시록도 두려움으로 읽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왜 사랑대신 두려움으로 계시록을 읽게 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살면서 경험했을 크고 작은 두려움-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받아들이는 두려움-을 회피하다가,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예수를 통해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면 그 두려움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21,22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곳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아픈 것도 다시 있지 않는(계시록21:4) 세계다. 아마도 그때쯤 나는 더이상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사람이 그토록 돌아가기를 고대해왔던 창세기 1,2장의 에덴동산과도 비슷한 모습일 것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신약시대가 시작하면서 빛으로 다가오신 예수를 통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만나왔던 것이며, 그 이전에 구약시대에는 그당시에는 무섭게 느껴졌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왔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하나님이 그리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며,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된다면 내 첫 반응은 '아, 당신이셨군요'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