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사/내 생각

내 인생의 트루먼쇼에서 벗어나며

내인생의 트루먼쇼, 한국식 기독교에서 벗어나며


1.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제목이지만 본래 의도는, 내 내면의 불합리함, 무의미함 등을 한국식 기독교(개신교)에 투사하고 있었는데, 그 투사된 이미지로부터 이제는 독립하고 싶다는 의미의 글이다. 기독교 자체는 신에게 나아가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으며 유서깊은 종교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개인은 그런 유서깊은 종교를 자신의 불합리함을 가리고 무의미함을 숨기는데 이용하기 쉽다는 것과, 한국의 기독교는 고도성장의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개인의 믿음도 고도성장을 해야 된다는 압력을 무의식적으로 수십년에 걸쳐 받아왔다는 것을 최근에야 비로소 느끼기에, 그동안 내 자신을 속여왔던 이미지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것이다.


2.

최근 일련의 생각의 변화로, 30여년간 내 주위를 둘러쌓은 기독교(개신교)문화로부터 한발짝 떨어져보려고 한다. 지난 십여년간의 경험- 대학생 선교단체에 의탁했다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결별한 과정,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공보의 과정, 융심리학에 몰입한 최근 몇년간의 경험-을 통해 인간이 믿는 믿음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약한 아이가 자랄 동안에는 가정의 보호가 필요하듯이, 30여년간 한국식 기독교 문화는 나를 보호해주었다. 그 덕분에 지금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어릴때와 같은 보호는 지금의 내게 과잉보호가 되는 것 같다. 독립할 때가 된 것 같다. 어릴때 필요했던 믿음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거기에는 과잉보호에 대한 반항심 내지는 불만이 어느정도 존재한다.


3.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대변되는 한국식 기독교 세계관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거기에 내 인생을 맡길 수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영혼을 지옥에 보내기 위해 애쓰시는 분이 아닐텐데, 어떤 이들은 '안믿으면 지옥간다'라는 식으로 협박하듯이 말한다. 사람들을 잘 타일러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건지, 자격에 미달되면 다 지옥에 보낼거야 라고 컷트라인을 말하는 것인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말하듯이 복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이게 좋은(?) 소식(Good news, 복음)이라고 하는데, 나는 협박이 어떻게 좋은 소식으로 변하는지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다. 사실 나라는 사람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의 인식으로 보기에는, 아마도 기독교의 하나님은 중립적인(침묵하는) 존재이면서 때로는 신비로움과 경외감, 혹은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마치 대자연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인 듯 하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 목회자들은, 부정적인 것은 모두 사탄에게 떠넘기며, 긍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덕으로 돌린다. 욥기에서도 하나님과 의견교환을 하여 하나님의 묵인하에 사탄이 일하는 장면이 나옴에도, 하나님의 이미지 속에서 악해보이는 부분은 모두 제거하고 선한 부분으로만 받아들인다. 선과 악으로 명쾌히 구분할 수 없는 것까지도 굳이 구분짓는 세계관은 더이상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살면서 보니 세상의 많은 일들은 선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얽히고 섥힌 일들이 많은데도, 마치 알렉산더대왕이 칼로 매듭을 자르듯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너무도 쉽게 단칼에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다보니 특정인의 개인적인 믿음-무엇을 믿는지도 잘 모르는 그 믿음-과 조금 다르면 순식간에 '악인'으로 낙인이 찍히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이제 그런 한국식 기독교 세계관(에 투사된 내 편협함)은 내 안에서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4.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좋은' 것인지 알기가 무척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게 첫인상이 좋게 느껴지는 일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받아들이며 결국 '좋으신 하나님'관념이 깨지지 않게 하는 그 문화에서 벗어나보고 싶고, 그렇게 '믿음'을 지키며 같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다보면 (세상의 성공같은) 복을 받는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보고 싶다. 사실 그 믿음의 뿌리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다. 기복신앙이라서 그런 것 같다.


5.

선을 행해서 거룩해지고자 하는 삶의 양식은, 점점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고 있음에도 , 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사실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은 기독교를 떠나거나, 적어도 한 번은 떠났다가 돌아오게 되는 것 같다.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야 기독교 교회안에 머무르고,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번은 떠나게 되는게 자연스러우니까.


6.

스스로 성인처럼 거룩-'거룩'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불확실한채-해지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기를 가르치는 기독교의 교리에 정면으로 상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지옥에 갈 염려가 없으며, 너희들은 안 믿으니 지옥에 갈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공동체는 과연 죄인들이 모인 곳인지 아니면 뛰어난 사람들이 모인 곳인지 알 수 없다. 굉장히 모순적인 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7.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목회자들에게 '나는 내가 죄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큰 죄를 짓고 살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고 말하면, '어허, 자기가 죄인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죄인이네' 혹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바리새인같은 사람이군'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훈계나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혹은 불신자들에게 '이러이러한 종교적 행동(성경,기도,헌금 등등)을 안하니 너가 지금 그렇게밖에 살고 있지 못하는 거야' '그동안 교회에 몸만 다녔는지 아직도 믿음이 그정도 수준밖에 안되는구나' 내지는 '당신도 나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읽어서 거룩한 성인처럼 살아봐야지, 그런 수준에 한번 도달해봐야지'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죄인들이 전하는 메시지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하다. 말하는 사람이 죄인이 아닌 거룩한 성인이거나, 아니면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에 비해 훨씬더 심각한 죄인인 상황이라면 납득이 된다.


8.

내가 죄인이다, 라고 고백해도 그것이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해지는 순간은 어딘가 찝찝하다. 마치 어린애가 부모에게 혼나면서 마음으로는 동의가 되지 않음에도 어쩔수 없이 '잘못했다고 해'라는 말에 '잘못했어요'라고 대답을 요구받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죄인이다, 라는 고백은, 남들에게 할 필요가 없는 고백이다. 누구보다 잘 아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하게 되어야 하는 고백일 것이다.


9.

사실 사람의 변화는 현실에서의 괴로움을 마주하거나 혹은 출구없는 스트레스 같은 불안과 긴장의 상태를 보내면서 일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인 기독교는, 하나님을 오직 책 한권(성경)속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길 때가 많으며, 책 속의 문장 하나의 표면적 의미에 집착하여, 그 문장 하나가 자신과 남들의 삶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줄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현실에서의 혹은 의식에서의 문제를 회피하는 행동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말씀 한 구절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가려주기를 기대하면서 '이제 내 죄는 용서받았군'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혹은 서로 영성이 높다, 믿음이 좋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의 구절 몇개를 골라 문자적인 의미만 생각하며 주문처럼 외우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10.

살아보니 사람을 바꾸는 것은 삶이다. 책이나 설교 혹은 여러가지 것들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지만, 결국 전방위적인 고민을 마주대하게 되는 삶의 장면들에서 개인의 인생이 전환되는 것 같다. 책들은, 그것이 기독교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성경이라 할지라도,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사람이 책만 읽으며 365일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을 잘 이해하고 그 의미를 더 잘 알게 되려면, 성경을 많이 읽어야 되는게 아니라 성경을 잠시 덮어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삶을 살고 난후에 다시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 같다. 삶에서 마주친 많은 괴로움들과 고민을 접하고 나면 성경이 달리 읽힐 것이기 때문이다. 사춘기와 사회생활을 안해본 사람이 누가복음의 탕자이야기를 읽는다면, 아마 탕자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나쁜 자식으로 읽힐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이든 감정적인 면이든 삶의 어두은 면을 마주해본 이들에게는 탕자의 절절한 마음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힐 것이다. 자식을 낳아보고 키워본 사람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사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읽는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전에 열심히 읽었던 성경읽기를 잠시 보류하고, 할 수만 있다면 현실에서 만나는 삶의 문제를 보다 정직하게 마주해보려고 한다. 성경에 대한 지적인 이해만으로 삶의 문제가 모두 풀릴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 개인적인 신념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현실을 살고 싶다. 물론 거기에 기독교의 하나님의 도움이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11.

내가 기독교의 모든 것을 버리려는 것은 아니다. 요즘에 아침 6시경에 산책을 하는데, 산책중에 경험하는 자연과 커다란 침묵은 내 하루를 풍요롭게 한다. 특히 일요일(주일) 아침의 산책의 감동은 몇배나 크다. 이런 삶의 패턴은 기독교인들이 새벽예배를 드리는 것과도 비슷할 것이다. 다만 내게는 교회에서 드리는 새벽예배보다는, 아직까지는 고요한 아침산책에서 더 큰 감동과 에너지를 받는다.


12.

산책중에 접하는 침묵에서 얻는 에너지는 아마도, 기독교라는 문화가 생기기 이전, 말과 글이 있기 이전, 세상에 혼돈과 침묵만 있었을 그때부터 있어왔을 것이다. 태초 아니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조물주의 신비를, 고요한 아침의 침묵을 경험하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있음에도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 시간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보는 것이리라. 그 짧은 순간에 느껴지는 커다란 신비감과 동시에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서 가르치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관심사 > 내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0) 2017.09.26
기도(기도 안하는 기독교인을 위한 글)  (4) 2017.08.24
내 인생의 신약시대  (0) 2016.04.17
내 인생의 구약시대  (0) 2016.04.13
아름드리교육공동체 숙제  (0) 2016.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