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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창조성의 회복, 프랭키 쉐퍼, 예영커뮤니케이션

창조성의 회복, 프랭키 쉐퍼, 예영커뮤니케이션

1. '하나님의 은혜로 이책이 나에게까지 왔습니다'

 

학생때 같은 선교단체에 있던 형(박O덕)에게 책을 빌려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책 속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좋은 책을 읽게 되어 드린 감사의 표현이었다. 벌써 10여년전의 일이니 그 때 빌려 읽은 책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그 형이 적었두었던 감동적인 표현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오늘, 속표지에 위와 같이 적어두고 싶은 책을 한 권 만났다.

 

2. 프랭키 쉐퍼

 

프랭키 쉐퍼는 영화감독이다. 나에게는 영화감독보다는 기독교사상가 프랜시스 쉐퍼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프랜시스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이 이론편이라면, 프랭키 쉐퍼의 이 책은 실전편이라고 생각된다.

'각 시대마다 교회는 그 시대 특유의 맹점을 가지고 있다'라고 시작하면서, 교회가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실용주의와 이원론에 잠식당해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세상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3. 이원론

 

기독교와 관련된 단어나 느낌(영성!)이 들어가야 거룩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현대의 기독교의 아픈 곳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로 인해 예술의 수준 또한 낮아졌다고 밝힌다.

나도 역시 알게 모르게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 모든 행동이 거룩한 것인데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니까.

 

라브리에서 자주 들었던 '물 한잔 마시는 것도 영적이다', '모든 직업은 성직이다. 죄짓는 것만 빼고'와 같은 말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음악들, 이를 테면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3중주(특히 대공), 바하의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과 같이 아름답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감동을 준 음악들이 꼭 헨델의 '메시아'보다 덜 거룩한 것은 아니다. 헨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음악을 썼지만, 다른 음악가들의 수많은 아름다운 음악 또한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으로 최고의 작품들을 만들어 냈기에 그들의 음악 또한 똑같이 거룩하다.

 

4. 주의할 점

 

이유는 모르겠지만, 곳곳에서 다소 과격한 표현이 눈에 띈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과격한 표현 때문에 반감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책이 나에게까지 온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쉐퍼일가의 책이 대개 그러하지만, 제목이 주는 느낌이 무척 딱딱하다. 나는 저자의 이름을 보고 책을 골랐지만, 제목만 본다면 책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내용은 약 130페이지, 그것도 중간에 삽화가 많아서 실제 페이지수는 많지 않다. 아마 소책자로도 출판할 수 있을 정도로.

 

읽기에 전혀 부담스러운 분량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정도 분량의 책에 이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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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3

만약 하나님께서 육체와 영혼,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어떤 정신적인 존재만을 단지 창조하신 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도 아니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도 아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현존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단지 영적이고 내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믿음은 우리의 삶에 아무 의미도 없다. 20세기의 기독교는 바로 이런 식으로 변질된 것이다.

 

p.63

'주님의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부모들에게 버려져 결국은 기독교를 원망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어린아이를 생각해보자. 부모가 영적인 볼일이 많아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아이는 탁아소에 맡겨져 있거나 집에서 혼자 TV앞에 앉아 있다. 그 대신 만약 부모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봐 주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기뻐하고 감사하며 함께 삶을 즐기도록 한다면 이보다 더 영적인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p.65

그리스도의 계명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며 그런 식으로 실천해야만 한다. 실제적인 생활과 아무 관련이 없는 영성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대신 엔진만 돌아가고 있는 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차에 탄 승객들은 엔진의 회전속도에 감탄하면서 서로를 축하하고 있는 형국이다.

활동 그 자체만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현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언론이 보도하는대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몇 백만 명이 된다고 하지만 그 증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도 많은 기독교적인 활동, 모금, 소비, 프로그램, 자동차 범퍼에 붙이는 광고 스티커, 거국적인 노력, 잡지 등에도 불구하고 왜 현대 문화는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반기독교적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가? 왜 미국은 우상을 숭배하는 국가가 되었나? 그것은 우리의 활동이 인간을 있는 그 현실 속에서 구속하여 이러한 성경적인 원리들을 창조성, 사회, 법, 정치, 예술 등의 진정 중요한 분야 속에서 실행하려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