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육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아니 어쩌면 딸아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아이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시작되었다. 양육의 방향성에 대한 이 고민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행복하려면 공부를 잘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포함한다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미래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녀의 '행복'을 목적으로 자녀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여러가지 고민을 하고 노력을 하고 잔소리를 할 것이다.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남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 의대에 입학했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되었다. 의사가 되고나서 조금 당황했는데, 무척 행복할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를 했기 때문인 듯 하다. 의사가 되고나서도 '나'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 뿐 아니라, 내 주위 동료의사들도 대개는 의사가 되는 순간엔 기뻐했지만 의사생활 자체를 행복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간혹 의사생활 자체에서 만족해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을 보면 '저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가졌어도 그 직업에서 의미를 찾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다.
지난 30여년간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초중고 시절의 기억, 그리고 지금의 기억 속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그 이전 어린 시절 나의 성격과 정서 형성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을 부모님의 양육태도를 더듬어보면서, 내 사랑하는 딸이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 양육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 고민에 대해 내 가치관과 세계관 안에서 두리뭉실하게나마 나만의 답을 만들어가고 있던 중에, 내가 생각하던,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듣고 싶어하던 답이 적혀 있는 책을 만났다. 문용린 교수의 정서지능 강의.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이 책의 내용이 '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교육과 관련된 문제점에 대해, 그리고 기저에 깔린 가치관의 문제까지 (내가 보기에)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 책이라고 생각한다.
2. 이성지능 그리고 정서지능
이 책에서는 그동안의 교육의 문제점으로, 이성지능에 대한 지나친 강조 그리고 정서지능에 대한 무관심을 꼽았다. 이성지능(공부머리)이란 이해, 추리, 계산, 기억하는 능력, 흔히 말하는 '똑똑함' 혹은 IQ를 말한다. 정서지능(마음머리,Emotional Intelligence,EQ)이란 이성 능력을 발휘하게 하거나 또는 억압하고 제한하기도 하는 감성 능력을 말한다. 이를테면 타인에 대한 이해심(감정이입) 자신의 감정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정서인식), 더 좋은 결과를 위해 당장의 유혹을 참는 것(만족지연능력)같은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생각하는 쪽의 능력만을 따졌다. IQ만 좋으면 당연히 만사형통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지난 1900년대 초부터 100여년 동안 사람들의 능력척도기준에는 IQ가 기정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IQ가 좋은 사람이 최고라는 생각이 우리들 머릿속에 깊숙히 잠재해 있다...IQ가 선발의 기준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똑똑한 사람이 환영받는 사회였다....."
"그런데 도저히 IQ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측면들이 인간의 삶 속에 있다는 사실을 학자들은 새삼스럽게 깨닫고 새로운 개념을 연구해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단지 생각하는 능력하고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출세하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p.30-31)
"이성지능이 높다고 해서 정서지능까지 높은 것은 아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IQ도 높고 정서지능도 높은 상태, 즉 머리는 차갑고(Cool head), 가슴은 따뜻한(Warm heart)사람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람은 드물다.
이성지능은 낮지만 정서지능은 높을 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름대로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성지능은 높은데 정서지능은 낮은 경우이다. 이럴 경우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이익과 만족만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범죄자들 의 정서지능이 상당히 낮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이 될 것이다.(p.32)"
이 책에서 정서지능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위에 인용한 부분이 아마도 가장 핵심적인(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어했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3. 소유가치 그리고 존재가치
'만약에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 해도, 변함없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가?'
양육의 방향성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행복하려면 공부를 잘해야만 하는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학교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의대의 인기가 지금보다 덜할 때 의대에 입학했다(지금같으면 의대 못들어간다). 그런데 만약에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면...솔직히 많이 아쉬울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 아이'라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사랑스러웠는데, 그리고 지금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매일 감사하면서 살고 있는데, 10-15년후 아이가 '만약'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덜 사랑을 받는다면, 부모인 나도 슬플 것이고 아이는 더욱 슬플 것이다. 더군다나 자녀의 입장에서 '공부잘했던' 부모의 기대를 느낀다면 부담감은 또 얼마나 클 것인가.
사람의 가치는 '소유가치'와 '존재가치'로 나눌 수 있다. 소유가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 귀중한 물건, 자격 때문에 '생기는' 가치이고, 존재가치는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있는 가치이다. 지금의 내 딸은 나에게 '존재가치'가 훨씬 큰데, 만약 공부를 못해서 덜 사랑하게 된다면 나에게 '소유가치'로 바뀌는 셈이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장 닮았다는 부모의 사랑. 나를 '존재가치'로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어 내 아이를 사랑하고 싶다.
그런 관점에서 정서지능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이 책이 반갑다. 이성지능이 좋지 못하더라도(즉, 공부를 못하더라도) 다른 가치(즉, 정서지능)가 분명히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욕심 같아서는 자녀가 이성지능과 정서지능 모두 뛰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만약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면 이성지능보다는 정서지능이 뛰어난 아이가 되면 좋겠다(이건 나중에 학부모가 되면 생각이 변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에 이성지능과 정서지능 모두 나쁜 아이가 된다면...안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때는 잘못 양육한 내 자신을 탓할 수 밖에.
4.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1)뛰어난 이성지능 2)뛰어난 정서지능 3)절대자(하나님)와의 만남이다.
이 세가지는 물(행복)을 담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판으로 대충 그려서 그림이 허접하다...)
1) 이성지능: 그릇의 바닥이다. 넓을수록 많은 물을 담기에 유리하다. 그러나 바닥이 아무리 넓어도 그릇의 테두리(벽)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2) 정서지능: 그릇의 테두리(벽)이다. 테두리가 높아야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다. 이성지능의 효용성을 극대화 혹은 극소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3) 바닥의 구멍: 절대자(하나님)를 갈망하는 마음. 그릇이 아무리 넓고 크다고 해도, 바닥에 구멍이 있으면 물이 흘러나간다. 많은 물을 붓는다면 일시적으로 물이 차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결국 바닥의 구멍을 막아야 물이 차 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사람의 행복 그릇의 구멍을 막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가 있다. 그 공허는 하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채워지지않는다'라고 말한 파스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 구멍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혹은 얼마나 큰 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구멍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실존인물 중에 이 세가지가 가장 완벽했던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아마도 故 이태석 신부님일 것이다.
5.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
책 중간에 정서지능이 뛰어났던 인물에 대해 소개를 한다. 그 중 서울대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나오는데, 고학으로 서울대 인문계 수석입학해서 유명해진 장승수씨의 이야기도 나온다. 예전에 EBS등을 통해 소개된 그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지만, 그가 했다는 말 한마디가 내 마음에 남아 참 많은 생각을 이끌어 냈다.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 이것은 지난 몇 년간 일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내가 몸으로 터득한 확신이다"
6. 마치며
내가 양육에 대해, 행복에 대해 오랫동안 해오던 고민... 그리고 어렴풋하게 만들어온 대답이, 교육학계에서 20여년전부터 수없이 연구되어 어느 정도 확립된 이론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반갑다. 그리고, 내 아이를 앞으로도 존재가치로 사랑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 하나를 찾은 것 같아 반가웠다. 저자인 문용린 교수는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이자, 김대중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지냈다. 책 읽기전에는 혹시 실패한 교육정책과 관련된 교육부장관은 아니었을까...하는 의구심과, 국내 최고대학의 교수이자 교육학계의 대가라는 믿음을 반반씩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읽고 난 후의 생각은, 우리나라 교육정책 문제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물어야 한다면 교육부장관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므로 그 책임에서 부모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참 좋은 책을 만났다.
'독후감 > 교육 & 육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학교를 칭찬하라 中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0) | 2013.02.13 |
---|---|
[책] 요아힘 바우어, 학교를 칭찬하라 (0) | 2013.02.13 |
[책] 자아놀이공원, 이남석 (0) | 2013.02.13 |
좋은 아빠 되기 프로젝트, 김성묵, 두란노 (0) | 2013.02.13 |
자식의 은혜를 아는 부모, 김동호, 규장(2/2) (0) | 2013.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