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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교육 & 육아

[책] 학교를 칭찬하라 中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이 책은 독일에서 먼저 출간된, 사립학교 교장이 쓴 책 '규율을 찬양하라'라는 책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러나 한쪽 이론에 대해 단순히 반박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교육과 발달에 대해 신경생물학적인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과연 우리 아이들을 위한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조곡조곡 논리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내가 감히 요약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굳이 한 마디로 책을 소개하라면, 현 시대의 교육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정답의 풀이과정이 적혀있는 해답지 같은 책...이라고 하고 싶다. 사실 교육에 국한되지 않고 현 시대의 가치관에 관한, 모든 문제의 본질을 보게 끔 하는 책이다. 이 시대의 학부모, 나아가 자녀가 있는 모든 사람이나 혹 교육정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에게는 필독서이다. 주옥같은 내용이 정말 많지만 모두 옮길 자신은 없고, 결론에 해당하는 저자의 글을 직접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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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   학교를 칭찬하라 中, 요아힘 바우어, p 155-159

 

 

학교 그리고 학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문제와 원인, 해결책에 관해 서술했던 이 책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잠시 뒤로 물러나 좀더 멀리 떨어져서 관찰해보기로 하자. 아동과 청소년들이 학습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우리는 오로지 '교육의 문제'로만 간주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그 이상의 문제일 수도 있다. 사는 방식에 익숙해 있는 어른들은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황폐함을 요구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인간적이고 아동과 청소년들을 환영해주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최근에 경제적인 압박감이 점차 증가하여, 직장을 갖고자 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이를테면 고향과 같은 뿌리의 말살(타 지방 근무나 해외 근무를 말하는데, 이를 '유동성'이라 부른다), 저녁 늦게까지 그리고 주말에도 일하기('노동 시간의 유용성'), 계획을 세울 수 없는 노동('미니잡minijob'), 무보수 노동('실습') 등. 이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것이 실직인데, 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렇게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변화하다보니 우리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한때 서 있었던 곳에 다시 도착하게 되었다. 즉 개인의 삶이 경제적 압박에 의해 경제적 절박함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적 고민이 아닌 모든 것은 부수적인 문제로 취급되는 세계 말이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사물들은 거꾸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경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경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최근에 통과된 많은 법률들은 경제 활동에 맞추어서 제정되었는데, 혼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며 판매원 일을 하는 여성과 아이를 돌보기 어려운 사람들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동과 청소년들이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갖고 적절하게 발전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니다.

 

아동과 청소년들에겐, 세상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들이 중요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에 맞춰 자신들의 기회를 인지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아이들이 노력할 만한 가치도 없는 환경, 이를테면 기회도 없고 전망도 없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 이는 오로지 교육 시스템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와 관련된 문제이다. 위대한 교육학자 하르트무트 폰 헨티히가 - 신경생물학적인 관점에서 - '유용해지기 위한 유용한 경험'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문제의 핵심을 알았던 것이다. 삶의 기본적인 동기는 신경생물학적인 욕구, 즉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그들로부터 인정받고 호감을 얻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다.

 

하르트무트 폰 헨티히의 의미에 따라 '유용해진다는 것'은 개인이 무의미하게 착취당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기계로 전락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뜻도 아니다. 유용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며, 개인이 공동체를 위한 기여를 통해 존중, 인정 그리고 삶의 기쁨을 찾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리고 오로지 이것만이 아동과 청소년들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이런 '의미'란 진공상태에서 부여되는 게 아니며, 추상적으로 가르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면 규율을 통해), 냉소적인 대중매체조차 제공해주지 못한다. 아동과 청소년들은 오로지 구체적인 사람들로부터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즉 그들이 함께 구체적인 경험을 할 수 있고, 자신들에게 애정을 주며 - 아이들을 믿기 때문에 - 그래서 자신들에게 뭔가 요구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만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교육과 교양의 요점은 아이들이 실제의 사람들과 행하는, 손에 잡히는 실제의 경험이다. 생생하게 행하는 공동작업과 개인적으로 체험한 좋은 본보기들은 동기를 갖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인간관계를 맺고 공동체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의 전제조건이 된다. 물론 공동체는 수많은 다른 전제조건 외에도 규칙들을 필요로 하며, 또한 의심할 바 없이 규율도 필요하다. 하지만 규율만으로는 어떤 공동체도 생겨나지 않으며, 인간적인 공동체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잘 해봐야 몇 십 년 전에 우리가 경험해본 그런 독재가 나올 뿐이다. 공동체의 규칙보다 공동체가 우선이다. 대부분 충분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공동체의 경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라난 아이들에게 규율을 요구한다는 것은, 집 앞에 지붕을 세우고자 하는 것과 같다. 젊은이들이 이해하는 마음자세로 규율을 만나기 전에, 그들은 개인적이고 충분히 좋은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규율이 공동체에 유용한지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동과 청소년들은 사회 규칙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가 호소해야 할 것은 규율의 훼손도 사회 규칙의 경멸도 아닌,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이런 규칙들과 함께 살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른들이 - 매출액에만 관심있는 산업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 수십만 명의 아동과 청소년들을 지도하고 지원하지 않고, 적절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컴퓨터로 고문하고 살해하는 놀이를 하도록 허락하는 나라에서, 규율을 찬양하라는 말은 지극히 기이하게 들린다. 청소년들과 함께 가치관에 대해 대화를 나누려면 우선, 잘 돌아가는 경제 외에 다른 가치가 우리에게 있기는 한지 자문해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잘 돌아가는 경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잘 돌아가는 경제' 그리고 아이들과의 '인간적인 공동 생활'이 서로 표류하지 않는 나라에서만 젊은이들은 교육, 성적 그리고 가치관에 열광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