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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책] 상처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두란노

요즘 여러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폭이 넓은 독서도 좋지만 깊이 있는 독서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읽었던 책 중에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책, 특히 정말 좋은 책이라는 느낌은 남아있지만 그 좋았던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지 않는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였다. 말하자면 좋은 책에 대한 기억이 뇌의 편도체(amygdala)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해마(hippocampus)에는 기록이 희미해진 책들을 다시 읽어서, 해마의 기록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다시 읽은 책은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의 '상처입은 치유자'이다. 처음 읽은 것은 본과1학년이었던 2000년쯤으로 생각된다.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 좋아해서 어떻게 보면 다소 신비적이고 몽환적인 생각 전개를 즐겼던 나였기에, 헨리 나우웬의 책에 깊이 빠졌었다. 신비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 무언가 생각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그 당시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해서 그런 식으로 인생과 신앙을 바라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신기한 것은, 다시 읽는 헨리 나우웬은 몽환적이거나 신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냉혹할 만큼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통찰이다. 그러고보니 지난 10년의 세월동안에 나란 사람이 신비적인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헨리 나우웬의 통찰과 묵상 그리고 날카로운 지적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의 무장해제를 시키는 것 같았다.
 
역사적으로 단절된 현대인의 비애와 고통, 외로움을 정확히 기술할 뿐 아니라, 자칭 사역자라고 칭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날카롭지만 애정이 담긴 분석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역자는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감없이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고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느끼는 긍휼의 사람이어야 한다. 즉 그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존재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 진정 우리의 동료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묵상하는 비평가이어야 한다.
 
10여년전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헨리 나우웬의 통찰에 동의했지만, 나와는 현실적으로 큰 관련이 없는 통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사역자'라는 말에서 오는 오해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자란 교회에서 사역자라고 하면, 전임 사역자(목사, 전도사)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교회에서 성도 모으는 일에 헌신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내가 알아들었는데, 그 당시 나는 그런 사역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런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생각이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역자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다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내 의도와 관계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사역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런 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사역자가 되느냐 사역자가 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생각이 이렇게 전개되니, 상처입은 치유자(사역자)라는 책이 내게는 매우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문제를 다루는 책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본질이라는 것이다. 마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Joshua Bell의 지하철 연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것처럼, 그리고 평소 violin연주에 관심이 있었던 단 한명의 사람만 그를 알아본 것처럼. 본질을 놓치는 일이, 사람의 원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죄성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신앙의 영역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헨리 나우웬은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신앙의 본질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과 묵상을 제시한다.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생명의 복음 대신 여러가지 활동이 주는 참여감, 혹은 인맥, 혹은 경제적 이익 같은 떡고물에 관심이 더 많은 교인(나포함), 전도를 위해 노력하지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보다는 교인수 늘리는 것 혹은 수치상의 교세확장에 관심이 많은 교인(나포함)과 목회자. 혹은 한 사람의 내면의 변화없이 표면적으로라도 무조건 자신들의 시스템에 복종하는 것을 요구하는 교인과 목회자...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나타나기 힘든, 한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격적) 관심과 긍휼,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믿음 그리고 소망이, 사역자(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이는 결국, 헨리 나우웬이 잘 지적했듯이, 무언가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혁신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2000년전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로 돌아가야 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긴밀히 기도하고 묵상하는 사람만이 그런 사역자(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마치 이미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효과가 검증된 치료제를 받았는데, 더이상 새로운 민간요법을 찾아 떠돌 필요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더좋은 무엇, 마치 의사의 처방 대신에 옆집 아줌마의 '누가 OO먹고 특효를 봤다더라~'하는 소리가 선천적으로 더 잘 믿어지는 성향이 있어, 특효를 가진 민간요법을 찾아 오늘도 길을 나서고 있는 현실......이런 현실을 헨리 나우웬이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 앞에 내 실질적인 상태를 가감없이 정직하게 드러내어놓고 대면할 때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확신이 없는 것은 확신없다...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정답을 들었을 때 정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또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는 데도 알고 있는 척 하는 사람은 정답을 들었을 때에 정답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런 면에서 시편을 쓴 사람이 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오늘의 나에게 더 절실한 기도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