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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경제학 & 사회과학

[책]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를 읽고 생각해보는 경제, 교육 그리고 세계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저자
장하준 지음
출판사
부키 | 2014-07-2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세계적인 경제학자이자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인 장하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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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론과 실제


세상에서 보이는 어떤 현실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제각각의 생각과 이론을 내놓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론적으로는 이론과 실제가 같다. 실제로는 그 둘이 같지 않다."(p.249)는 말로 그 둘의 관계를 정확히 정의내렸다. 경제학의 역사에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느 한가지 이론이 현상을 완벽히 설명하지 못함에도 현상을 이론에 끌어다대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다보니 특정시대 특정지역에서는 고전주의가, 또 다른 곳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경제이론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중에는 당대의 기득권층을 위한 논리가 있었고, 동시에 약자를 위한 논리가 존재하기도 했다. 그것이 다소 온건한 형태에서부터 과격한 것까지 다양하게 존재해왔다. 이처럼 다양한 경제학파를 저자는 9가지로 정리해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간결하게 정리했다. 이른바 '경제학파 칵테일'이다. 


이론은 이론이고 실제는 실제였다. 저자가 소개한 각 이론들은 대체로 많은 현상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음에도, 마치 모든 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듯한 권위를 가지고 생각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억압해왔다. 때로는 가치판단없이 '순수한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연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절대로 객관적일 수가 없는 학문이 경제학이다. 저자는 경제학의 이런 특징을 지적한다. 아울러 순수한 척 하는 경제학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언질도 준다.


경제학은 일종의 세계관이다. 세상을 볼 때 '각 개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행동하므로 시장이 오작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만 놔두는 것이 좋다(신고전파)'는 생각으로 경제현상을 바라볼지, '후진 경제에서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놓으면 개발이 불가능하다(개발주의 전통)'고 바라볼지, 혹은 '개인이 사회적 규칙을 바꿀 수 있다 해도 결국 개인은 사회의 산물이다(제도학파)'라고 바라볼지 각 사람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다르다. 각각의 세계관 중에 모조리 틀린 것도 없도 모조리 옳기만 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은 어느 한가지 이론이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생각이 다른 사람은 다른 시각으로 같은 현상을 보고 있음에도 틀렸다고 비판한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할수록 헛점이 많은 셈이다. 어쩌면 자기의 눈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인간의 제한된 능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저자는 가능한, 여러가지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도록 격려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이론 중에, 아니 앞으로 나올 이론을 포함시키더라도 모든 현상을 모든 시대에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이론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면, 여러가지 학파 중에서 자신의 생각에 가까운 한 두가지를 정하고 그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책을 읽어본 나로서는, 저자에게 설득당했는지는 몰라도, 개발주의 전통이 가장 바람직해보인다. 


역설적인 것은, 각 학파중에 특별히 자신들의 생각이 더 옳다고, 혹은 완벽하다고 강력한 목소리를 낸 이론일수록, 그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 또한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단점을 모르는 사람에게 단점이 가장 많은 것과 비슷하다. 1980년대 이후 득세하고 있는 신고전주의 학파가 그러하며, 70년간의 실험 끝에 처참한 상처를 내고 끝난 마르크스주의도 그러하다. 사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이후에 진행될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었음에도, 자본주의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러시아와 중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그러나 매력적이기는 한) 이론을 섣불리 따라해서 미숙하게 태어나, 남은 인류역사의 큰 상처가 된 셈이다. 그러고보면 개인도 그렇다. 자기 생각이 가장 옳다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일수록 대체로 주위사람들에게, 그리고 결국에는 본인에게도 상처가 된다. 스스로만 옳다고 주장할수록 헛점도 많아진다. 


그러면서도 개인의 삶은 흘러가고, 역사 또한 진행된다.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생각보다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고 보니 퀴블러 로스의 책 제목이 '인생수업'이 아닌가. '완벽한 인생' 혹은 '인생전문가'가 아니라 '인생수업'이다.



2. 교육과 경제


다양한 경제학파에 대한 부분을 읽다보니, 육아와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경제학파가 마치 사람에 대한 관점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했듯이 '각 개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행동한다'는 입장의 신고전파나 '모든 것을 충분히 아는 사람은 없으므로 아무한테도 간섭하면 안 된다'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입장은 심리학으로 치면 '자기 결정성 이론 self determination theory'와 매우 유사하다. 


자녀교육에 대해 적용해보자면 이런 것이다. 자기결정성 이론에 따르자면, 아이들은 때가 되면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므로 아이가 오작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만 놔두는 것이 좋다, 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요즘의 대한민국처럼 아이들은 가만히 놔둬도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유능한 교사와 좋은 학교, 학원에서 교육을 받도록 부모가 전적으로 지원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데, 이는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주의나 행동주의와도 세계관(인간관)이 비슷하다. 마르크스주의(자본주의는 경제 발달의 막강한 동력이지만, 사유 재산이 더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면서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p.131)' 혹은 행동주의(인간은 충분히 똑똑하지 않기 때문에 규칙을 통해 의도적으로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p.159)'와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앞의 문장을 조금 바꿔 '자율성은 학업 발달의 막강한 동력이지만, 놀고 싶어하는 본성이 더 이상의 성적향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면서 저절로 (성적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뒤의 문장을 조금 바꿔 '아이는 충분히 똑똑하지 않기 때문에 사교육을 통해 의도적으로 놀이의 자유를 제한해야 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비약이 지나쳤을지 모르지만, 그냥 덮어가기에는 대한민국 사교육의 폐혜가 너무 크다. 그래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잘못 실행한 러시아와 중국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이 원하면 아무 때나 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으며,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해서 체제가 요구하는 기술과 제도적 기반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온다(p.134)' 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거의 발달하지 않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되었다(p.135)'고 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사교육도 비판할 수 있다. 사교육은 (마르크스주의처럼) 원래 합리적인 면이 많고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자생한 마르크스주의가 왜곡되었듯이, 대한민국의 사교육도 왜곡되었다. 사교육은 특정한 상황 속에 있는 특정한 개인(아이)에게 효과가 있을 것임에도, '내 아이'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에게 효과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교육을 일률적으로 및 강압적으로 시킨다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 그러다보니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 중에 학원의 이름을 빛내줄 아이가 있는 반면 학원 전기세 내주러 다니는 아이도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이런 면에서는 케인스학파(개인에 이로운 것이 전체 경제에는 이롭지 않을 수도 있다)의 생각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나는 강남이나 목동에서 권위를 갖는 사교육에 대해서는 회의적인데, 내 교육철학은 아이가 스스로 흥미를 느껴서 몰입하게 될 때 최고의 능력이 발휘하게 되므로, 아이의 자율성이 발휘되게끔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교육철학은 경제학파로 치자면 신고전주의, 오스트리아학파 외에도 개발주의(후진 경제에서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놓으면 개발이 불가능하다)와도 비슷하다. 


어느 것이 가장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고전파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도 아닌, 슘페터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 실제의 슘페터 학파에서 생각하는 미래와 비슷해서, 낙관적인 그림이 아니다. 저자의 다른 책 '나쁜 사마리안인'에서 소개했던 비유를 가져와 생각해본다. '여섯 살 먹은 아이를 노동시장으로 몰아넣는다면 아이는 약삭빠른 구두딱이 소년이 될 수도 있고, 돈 잘버는 행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슘페터학파라면 여기에 문장 하나를 더 붙일 것이다.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되더라도, 누구나 교육을 받아 그리 될 수 있다면 그가 받은 수입은 평범해질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부모들이, 특히 경제력이 뒷바침되면 더욱 더, 자녀를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될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슘페터학파의 주장, 즉 '시간이 흐르면 경쟁자들이 그 혁신을 모방해서 모두의 이윤을 '정상'수준으로 끌어내리게 된다. 한때 애플 아이패드가 독점했던 태블릿 컴퓨터 시장에 지금 얼마나 다양한 상품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p.146)'는 말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모두가 (사)교육에 매달리게 되면 모두의 이윤이 '정상' 수준으로 끌어내려진다. 실제로 지금은 4년제 대학을 나왔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시대는 이미 한참 지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무작정 대학을 가지 않는 것도 정답이 되긴 어렵다. 이러나 저러나 어려운 시대이며,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이전이나 지금이나 어려운 시대라는 점은 똑같다.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면 가능한 남들보다 일찍 되는 것이 개인에게는 이롭다. 그러기에 모두가 교육에 매달리는 것일텐데, 모두가 교육에 매달리면 다같이 어렵다. 끝이 나지 않는 문제다. 끝이 나지 않는 문제에 답을 얻으려면, 답을 다른 곳에서 찾거나 질문을 바꿔보아야 한다. 이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한 질문도 좋은 질문이다. 


3.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않은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명제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도 일부 얻을 수 있었다. 경제학에서도 사람의 행복도에 관심을 갖는데, 위 명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두 가지 입장을 취한다. 하나는, 빈곤에는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을 비롯해 다차원적 빈곤이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숫자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경제학으로서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실제 숫자)이며,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않은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저자의 가치판단이 들어있는 대답으로서, '완벽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줄이는 것은 가능하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에필로그에서 '무엇이든 되기 전까지는 다 불가능해 보인다'(p.435)며 넬슨 만델라의 말을 인용한다.


또 하나는 이른바 허위의식 false 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억압을 받거나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 중에 억압자/차별자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자신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현상(p.227)이 있다는 점을 소개한다.  


4. 후생유전학, 후생경제학.


의학의 한 분야 중에 후생유전학(epigenetics)이라는 학문이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기는 하지만, 출생시 가지고 태어난 유전자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주위의 환경과 인간관계 등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가 변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출생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과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를 유기체로, 그래서 역사를 경제의 인생으로 본다면 후생경제학(epi-Economics ?)라는 학문이 생겨날지도 (혹은 이미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후생경제학이 있다면, 사람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최선의 정의를 내리며, 절대선에 더욱 가까이 가는 학문이 되면 좋겠다.


생각을 너무 많이하면서 글을 쓰다보니, 산만한 글이 되어버렸음에도 고쳐쓸 마음의 여유도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