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 1악장
2012년... 올해로 나이 서른 넷이 되었다. 이미 20대를 보낸지는 한참되었지만 서른넷이 된 이제야 비로소 마음으로 20대를 떠나보내는 느낌이다. 이렇게 쓰면 얄궃은 친구녀석은 '20대가 아니라 30대도 생각보다 얼마 안남았다'라고 맞받아칠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나의 20대에 대한 아쉬움 혹은 미안함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었나보다. 그러고보니 20대를 참 정신없이 보냈다. 학생 때는 그나마 기분 좋게하는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데, 인턴과 레지던트를 했던 스물여섯에서 서른살에 이르는 시간은 마치 암흑으로만 칠해버리고 지나온 듯 하다. 마치 편지를 쓰면서, 상대에게 말하고 싶은 내용은 적지 못하고 엉뚱한 내용만 잔뜩 써버린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그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전문의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마치 전문의면허증을 얻기 위해 내 소중한 무언가를 내어 준 듯한 느낌이다.
예과 1학년이던 1998년... 그 당시 집에 가려면 서곳교회 앞을 지나야 했는데, 1998년의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교회를 들르곤 했다. 평일 저녁에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들러, 붉은색 천으로 깔려있는 강대상 옆의 빈 공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면, 고요한 예배당의 적막이 깨지며 내 작은 목소리가 찬 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올라갔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20살의 나는 왜 그리도 생각이 많았었는지... 그 많은 생각중에 일부를 예배당에서 조용히, 그러나 허심탄회하게 말하면 마치 하나님이 내 기도만 듣고 계신 듯한 느낌이 들곤 했었다. 넓은 예배당에 나 혼자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도를 했지만 대부분은 감정의 불안정함에 대한 호소, 그리고 가지고 싶지만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호소였다. 그 중 기억나는 것 하나는 인턴과 레지던트과정을 잘 이겨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 기도를 올린지 14년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대학, 전공의 그리고 군복무까지 거의 마쳤다. 나는 여기까지를 내 인생의 '1악장'이라고 하고 싶다.
2. 애절하리만큼 아름다운
서양고전음악, 특히 협주곡중에 3개의 악장으로 되어있는 곡이 많다. 곡마다, 작곡가마다 다르겠으나 대체로 1악장은 빠르고 경쾌하며, 웅장하고 힘이 넘치며 화려하다. 그래서 1악장을 들으면, 특히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같은 곡의 1악장은 듣는 사람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그에 비해 2악장은, 역시 곡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애절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2악장을 들으면, 특히 베토벤의 '황제' 혹은 브루흐(Bruch)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Brahms)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은, 듣는 이의 마음을 녹인다. 나의 인생 1악장 역시 클래식음악의 그것과 비슷했다. 빠르고 유쾌했으며, 때로는 치열했다. 그러고보니 곡을 듣는 중에는 길게 느껴지지만 듣고 나면 짧게 느껴지는 것까지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제 내 인생의 1악장을 보내고 2악장에 접어들 때가 온 것 같다. 클래식음악의 2악장을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애절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내 인생의 2악장은 '사람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감동'이 되었으면 좋겠다.
20대의 나는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나타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나를 책과 친해지게 만들어주었으나, 때로는 도를 넘어 타인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지식과 성과를 통해 경쟁하는 시절이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기는 했지만, 그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못하리라. 그런데 한해한해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그동안 했던 생각들이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테면 아픈 사람을 치료할 때 정확한 의학지식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픈 사람이 정말 힘들어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때로는 아픔을 공감하는 따뜻한 한 마디가 처방전보다 나을 때도 있다. 비단 진료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는 부부사이에도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모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오긴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 눈에 비치는 상대방의 부족한 점만을 지적한다면, 부부간의 갈등과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말 한마디가 때로는 비싼 선물보다도 귀할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내 인생의 2악장은, 마치 클래식 음악의 2악장이 듣는 이의 마음을 녹이듯,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듣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어렵게 썼지만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다. 가장 먼저는 내 아내에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 먼저 보는, 나란 사람에게서 상처를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딸아이에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진유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준 적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며, 혹 아직까지 상처를 준 적이 별로 없다손 치더라도 이제부터 겪어야 할 성장기, 특히 사춘기가 남아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서도 내 마음의 폭이 된다면, 내가 진료실에서 만나게 될 아이들과 엄마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싶다.
3. 지휘자와의 만남
클래식음악의 3악장은, 역시 곡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1악장의 당당함과 화려함 그리고 2악장의 부드러움과 애절한 아름다움을 마치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듯, 힘있고 경쾌하며 박력있다. 나는 내 인생의 3악장도 그러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야 말로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 인생의 1악장의 시작부터 하나님은 함께 하셨을 것이다. 내가 직접 인식하지 못했을 뿐. 1악장에서는 언뜻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를 얻은 것처럼 보이나 사실 하나님이 1악장의 시작부터 지휘를 하고 계셨으며, 비로소 타인의 마음을 이해해보려는 2악장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지휘를 하고 계셨다. 아직 내 인생은 2악장의 시작 단계라고 여겨지기에 3악장에 대해서는 흐릿하게 그려볼 수 밖에 없지만, 아마도 3악장에 가면 내 인생의 지휘자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뵙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