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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문학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R.M. Rilke, 고려대학교출판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그동안 책읽기에 있어서 문학을 너무 소홀히 했다는 생각에 고른 책... 이미 당대에 유명 시인이 되어있는 릴케가, '카푸스'라는 젊은 문학도에게 쓴 편지를 모은 책이다.

 

1. 편지


"저는 편지를 아직도 인간들 사이의 가장 멋지고 풍요로운 교제 수단으로 생각하는 구시대풍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입니다."  -리제 하이제에게 보낸 편지中-

 

그렇다. 다만 지금은 전화, 그리고 릴케의 시대에는 없었던 인터넷의 등장으로, 편지지에 편지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어쩌다 편지를 쓰더라도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쓸 때마다 고민하며 펜으로 쓰는 시대가 아니라, 언제든지 수정이 가능한 워드프로세서로 편지를 쓰고 프린터로 출력해서 봉투에 담는 시대가 되었을 뿐... 사실 봉투에 담고 인편으로 전해지는 시간도 아까워서 이메일로 편지를 쓰는 시대가 되었다. 편리함을 얻었지만, 그만큼 아날로그의 감성을 잃어버린 시대... 아마도 릴케가 현재를 산다면 무척이나 당혹스러울 것이다.

 

릴케가 편지쓰는 것을 즐겼기 때문인지, 혹은 고독을 즐겼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100여 쪽의 두껍지 않은 이 책에서 삶에 대한 릴케의 깊은 통찰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쓰여진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2. 일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첫번째 편지中)"

 

자신의 일에 대해 스스로 이만큼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 그리고 미치도록 사랑하는 일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릴케는 자신이 하는 일을 무척 사랑한 것 같다. 사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지 못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내가 하는 일에, 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3. 성性


"성(性)이란 어렵습니다...... 육체적인 쾌감은 감각적인 체험으로서, 이것은 순수한 직관이나 우리의 혀를 가득 채워주는 달콤한 과일의 순수한 느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크고 무한한 경험이며, 세계에 대한 인식이며, 이러한 모든 인식의 충만이자 꽃봉오리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받아드리는 것은 나쁜게 아닙니다. 오히려 나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을 오용하고 낭비하고 자신들의 삶의 따분한 곳을 긁어줄 자극 정도로나 생각하고 그리고 최고도의 절정을 위한 집중이 아닌 기분풀이 정도로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

표면적인 것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깊은 곳에는 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비밀을 그릇되게 그리고 나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러한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습니다)은 자기들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마치 봉인된 편지처럼 내용도 모르는 채(손에 들고 있다가) 그냥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네번째 편지中)"

 

카푸스의 편지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릴케의 답장으로 미루어볼 때 카푸스는 성性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고민에 대해 릴케는, 그가 깨달은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사람에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위험하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성性에 대한 릴케의 통찰이 놀랍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본능에 이끌린다'는 단 일곱글자로 합리화시키지만, 릴케는 성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을 각각의 개인에게 배당되었음을 확인시키고, 나아가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창조가 될 수 있음을 젊은 시인에게 주지시킨다. 28살의 젊은이에게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4. 여행... 그리고 일상


"로마는 (우리가 이 도시를 아직 잘 모르는 상황에서) 처음 며칠동안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슬픈 기운을 풍겨댔습니다. 그것은 로마가 내뿜는 무기력하고 침울한 박물관 같은 분위기, 도시를 가득 채운, 땅에서 파내 간신히 보존해놓은 과거들, 그리고 이 모든 일그러지고 부패한 물건들에 대한 일반 학자들 및 문헌학자들의 언급과 이들의 말을 그냥 따르는 평범한 이탈리아 여행객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과장된 칭송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따져볼 때 그러한 물건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대, 다른 삶의 우연한 잔해물들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을 거부적인 태도로 몇 주를 보낸 후 마침내 우리는, 좀 혼미스럽기는 하지만, 자신을 되찾고 혼잣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이곳에는 다른 곳보다 아름다운 것이 더 많지는 않아....... 하지만 사실 이곳에는 많은 아름다움이 있어. 어딜가나 아름다운 것들 천지이거든.' (다섯번째 편지中)"

 

어떻게 읽으면 로마라는 위대한 유산을 폄하시키려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릴케는 '위대한 유산'이라는 의미속에 거추장스럽게 덧붙여진 수많은 불필요한 가치, 그리고 학자들의 권위를 걷어내고 로마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직접 바라보고 느끼고 있다. 나아가 이탈리아라는 여행지 뿐 아니라 자신이 숨쉬고 있는 일상, 그 일상이 가장 아름다운 곳임을 릴케는 직시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여행의 의미는 '아름다운 곳을 본다'는 것 외에도, 일상에서 벗어난 후에 '일상속에 있는 자신'에 대해 제 3자의 시각이 되어, 천천히 보고 느끼는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 때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여행을 위해 짐을 싸는 시간부터, 즉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즐거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5. 고독 그리고 사랑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습의 도움을 빌려) 모든 것을 쉬운 쪽으로만 해결해 왔습니다. 쉬운 것 중에서도 가장 쉬운 쪽으로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것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그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중에 가장 힘든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모든 작업은 사랑이라는 작업을 위한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면에서 초심자인 젊은이들은 아직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즉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우는 기간은 언제나 기나긴 밀폐의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오랫동안 인생 속으로 깊이 몰입하는 고독입니다...... 융합과 헌신과 모든 종류의 유대는 아직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젊은이들은 앞으로도 오래토록 힘을 비축하고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이 점에서 그토록 빈번하게 그리고 그토록 통탄스럽게도 실수를 범합니다. 사랑이 그들에게 다가오면,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고 자신들을 흩뿌려버립니다......그 뒤에 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일곱번째 편지中)"

 

아마도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절정인 듯 하다. 삶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힘든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말하고 있다. 힘들다고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그 시간 때문에 삶이 더 소중해진 경우가 있다. 물론 너무 힘든 경우 그 일 때문에 삶이 좌절하게 되거나 피폐해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기에 삶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경우 또한 주변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치가 있는 것은 어렵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한 가지 기술을 익히거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데에도 몇 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보다 더 가치있는 아름다움은 그보다도 더욱 긴 인내를 요할 것이다. 릴케는 가장 아름다운 가치인 '사랑'을 위해서는 긴 인내의 시간인 '고독'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사랑을 위한 과정이기에 '고독'까지도 소중한 시간임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말해주고 있다.

 

6. 스물 여덟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편지를 썼다기에 나는, 편지를 받은 젊은 시인은 아마도 20대정도 되었을 거라 생각했고, 릴케는 아마도 노인이 되어서 편지를 썼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편지를 쓸 당시 릴케의 나이가 28살이었고, 편지를 받은 젊은 시인은 10대 중반쯤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은, 당연히 인생을 조망하는 시야를 가진 지혜로운 노인에게 나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책 뒤의 연표를 보니 편지를 쓸 당시 릴케의 나이가 28살이었다...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반전이었던 것 같다. 아... 28살의 '젊은' 릴케가 이런 책을 쓰다니... 정말이지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것 같다. 나의 이런 반응에 릴케는 광고카피를 빌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