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누군가의 말처럼 톨스토이의 소설은 한 편의 설교같다. 나는 그 설교가 그리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를 스스로 되돌아보게끔 만든다는 점에서, 특정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직접적인 설교보다 나은 부분도 없지는 않다. '전쟁과 평화'는 카이사르 이후 유럽을 가장 완벽하게 제패했던 나폴레옹의 시대에,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부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물을 다양한 상황속에 설정해 놓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톨스토이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4편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이며 이제 1편만을 읽었지만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은 '설교'의 주제는 어느정도 윤곽이 보이는 듯하기에 중간 독후감을 정리해본다.
개인 혹은 특정집단의 욕망-옳고 그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혹은 다른 집단과의 갈등의 해결을 위해, 아니면 경제발전을 위한 수요의 창출을 위해 필요하다는 음모론적인 이유까지... 그러고보면 전쟁은 인류의 역사에서 필요악이었는지도 모른다. 톨스토이는 소설속에서, 전쟁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가 정말로 중요한 것인지 독자로 하여금 다시 생각해보는 단초를 제시한다. 전쟁으로 인해 생길 수 밖에 없는 잔혹함과 부질없음을 통해서.
2. 잔혹함
"또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안드레이는 말을 계속했다. "만약 제가 전사하고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 곁에서 떼어놓지 마세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게 해 주세요"...... 그는 아내와 포옹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그만 정신을 잃고 남편 어깨에 쓰러졌다.(p.153)
'그렇다. 나는 내일 전사할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이 죽음의 생각에 수반하여 갖가지 추억이, 아득한 일련의 추억이, 더없이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아버지와 아내와의 마지막 이별을 회상하였다. 그는 또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을 상기하였다. 아내의 임신을 회상하였다. 그러자 그녀도 자신도 가엾게 여겨졌다....(p.363)
그는 최근 받은 어머니의 편지가 생각났다. '만약, 지금 이 들에서 대포의 과녁이 되고 있는 나를 보신다면 마음이 어떠실까?' (p.393)
그렇다. 전장에서 쓰러지는 군인 한 명은, 단지 사람 한 명이 아닌, 누군가의 아들이요, 누군가의 남편이요, 누군가의 아버지이다...... 8만명의 군대가 적에게 괴멸되었다면, 이는 단순히 8만명의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8만명이 죽는 것이다.
3. 부질없음
톨스토이가 전쟁의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게끔 제시하는 두번째 단초는 '부질없음'이다.
니꼴라이는 고개를 돌려 무엇인가를 찾는 듯이 먼 경치, 다뉴브 강의 물,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어쩌면 저렇게 푸르고 고요하고 깊을까! 멀리 내다보이는 다뉴브 강의 물은 얼마나 부드럽게 빛나고 있는가!...... (p.205)
그에게는 이 순간, 나폴레옹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관심이 실로 부질없이 여겨지고, 보잘것없는 허영과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힌 이 영웅의 모습이, 자기가 보고 이해했던 저 드높고 공평하고 선량한 하늘에 비하면 몹시 시시하게 여겨졌다......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위대함의 부질없음과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질없음에 대해서, 그리고 또 살아 있는 자는 누구 한 사람 그 뜻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죽음이 지니는 삶 이상의 부질없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p.403)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대자연 앞에 서면 감탄하게 되고, 여러가지 장신구와 화려한 옷으로 아름답게 꾸민 사람이라도 들에 핀 백합화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작가는, 나폴레옹의 추구를 자연과 생명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한낮 부질없는 것으로 격하시킴으로서 전쟁의 부질없음, 나아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많은 것들이 부질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전쟁의 잔혹함과 부질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전쟁은 '惡'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간혹 몰라서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매우 이성(理性)적인 사람이더라도 결정적인 행동의 변화를 이끄는 것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참을 忍(인)자 세 번이면 殺人(살인)을 면한다'는 격언도 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세 번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말이 만들어졌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작가가 그 점을 몰라서 이렇게 긴 소설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은 그렇다. 작가는 사람의 그러한 특징-감정에 이끌리는 동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 서로를 공격하고 상처주는 사람들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4. 정략결혼
소설속에 정략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두 커플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어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권위있는 베주호프 백작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사생아여서 사람들로부터 홀대를 받는 삐에르의 이야기이다. 베주호프 백작이 죽으면서 전재산을 사생아인 삐에르에게 남기게 되면서 삐에르는 졸지에 거부가 되며 백작 칭호까지 받는다. 그런 삐에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바씰리 공작은, 삐에르가 백작이 되고 많은 유산을 받자 자신의 딸 엘렌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엘렌은 소설에서 굉장한 미인으로 그려지며, 부자인 백작부인의 삶을 동경하기에 삐에르에게 일부러 접근하는데, 삐에르는 보잘것 없었던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렌을 보고 '내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도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되었는지' 스스로 놀랍게 여긴다.
다른 커플 역시 바씰리 공작(엘렌의 아버지)이 관여한다. 자신의 망나니 아들 '아나똘리'를 유력한 집안인 볼꼰스키 공작의 딸 '마리야'와 결혼시키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나똘리는 마리야를 만나러 볼꼰스키 공작의 집으로 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곳에서 마리야의 몸종 '부리엔'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진다. 소설에서는 마리야가 매력없는 외모를 가진 것으로 그리고, 부리엔은 예쁜 외모를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온 남자가 자신보다 예쁜 자신의 몸종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데... 마리야는 이 장면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부리엔은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고 많이 외로웠을테니 명망있는 집안으로 시집가서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살면 행복할거야...'라면서.
예쁜 외모를 찾는 일반적인 남자들의 모습을 다소 황당하게 그린, 두 정략결혼 이야기를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황당하긴 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외모 이외의 매력을 느끼고 자신의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도 많이 있지만, 외모의 매력만을 찾는 남자들 또한 많기 때문이다. 충분히 일상적일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예측하지 못한 것은 '못생긴' 마리야의 반응이다. 일반적인 이야기라면 그 남자에게 크게 실망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이 보통인데, 소설에서는 '부처'의 모습을 느낄 정도로 깊은 이해심을 보인다. 이후 전개되는 소설에서 궁금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후에 '마리야'는 어떤 인물로 그려질까... 일순간의 이해심은 역시 본심이 아니었고 화를 내거나 복수를 꿈꾸는 모습으로 그려질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게 될까... 궁금해진다.
5. 포로로 잡힌 장교
러시아의 장교 안드레이는 부상을 당해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히고 나서, 전쟁의 잔혹감과 부질없음에 대해서 분명히 깨닫는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극히 평범한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도 전쟁의 부질없음에 대한 생각을 조금 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황제'를 위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전투욕을 드러내며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포로로 잡히고, 나폴레옹도 그를 '특별한' 포로로 대하면서 1편이 끝났다. 소설 제목이 '전쟁과 평화'이고 총 4편까지 있는 장편소설인데, 1편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안드레이가 벌써(!) 프랑스군의 포로로 잡혀버렸다... 이후 3편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가 된다. 나폴레옹을 대면하고 프랑스군에서 포로로 있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혹은 프랑스와 러시아-오스트리아연합군간의 전쟁이 지금까지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 안드레이(그리고 그 가족)의 운명도 달라지게 될는지...... 1편에서의 시대적 배경이 1805년 11월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차이코프스키로 하여금 그 유명한 '1812년 서곡'을 작곡케하였던, 나폴레옹의 무리한 모스크바 침공까지 전개되는지 궁금하다. 기대가 된다.
'독후감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원 교향악, 앙드레 지드 (0) | 2013.02.13 |
---|---|
십자군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0) | 2013.02.13 |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R.M. Rilke, 고려대학교출판부 (0) | 2013.02.13 |
[책] 간디 자서전, 함석헌 (0) | 2013.02.13 |
[책] 부활, 톨스토이 (0) | 2013.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