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막연히 교회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이라고만 알고 있던 십자군 전쟁.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가 쓴 책을 소개받아 읽게 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빌려서 행한 폭력'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나에게는,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늘 피하고만 싶던 사건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의 눈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1. 정치적 타결책으로서의 전쟁
음모론적인 측면이 있는지는 모르나, 정치적 경제적 난국을 헤쳐가는 한 가지 방법이 전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중세 유럽의 황제에게 밀리기 시작한 교황은,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하며 유럽내에서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책략으로 십자군 전쟁을 제안한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교황의 명령이기 때문에 국교가 카톨릭인 나라에서는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으며,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는 평민들 중 일부도 전쟁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 교황과 황제의 힘겨루기이다. 역사적인 기록을 내가 확인할 능력도, 마음도 없지만 저자의 이야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지금도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스스로의 존재목적-신앙과 정치-과는 대립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뜬금 없긴 하지만, 이러한 시야가 나에게는 약간의 자유로움을 주었다. 교회 역사의 '치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한발짝 물러서서 '자연인으로서의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이런 마음의 여유는 '약간'일 수 밖에 없다. 속내야 어찌되었든 전쟁의 명분은 '종교'였기 때문이다.
2. 성인 베르나르두스
1차 십자군 전쟁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어,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안티오키아, 에데사, 트리폴리 등으로 이루어진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상주 인구가 적으므로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릴 수 밖에 없어서, 유럽에서는 군대를 모아 2차 십자군을 출정하게 된다. 2차 십자군을 출정시키도록 동기를 부여한 이의 이름이 베르나르두스인데, 당대 유럽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어서, 교황까지도 베르나르두스에게 조언을 구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이슬람교도를 악마로 규정하고, 전쟁을 통해 멸하도록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을 선동한다. 베르나르두스가 기사들에게 했다고 하는 말이다.
'(이슬람교도는) 악마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악의 표본이다. 이 자들에 대한 대책은 하나밖에 없다. 근절이 바로 그것이다. 죽여라! 죽여라! '
이런 설교(?)를 듣고 유럽의 각 왕들은 군대를 모아 2차 십자군으로서 출정한다. 이런 말로 선동한다고 해서 따르는 왕들도 쉽게 이해는 안가지만, 그래도 교황의 권력이 높던 시대라고 감안하면 그럴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은 든다. 갑(甲)이 시키면 을(乙)은 따라야 하니... 그 와중에 이런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다. 1차 십자군 때의 일인데 은자 피에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수만명의 무리가 아무런 준비없이 전쟁에 참가하고자 동방으로 떠났다. 그들의 상당수는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고, 전장에 도착한 사람들도 전쟁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열정도 없던 사람들이기에 전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성가신 존재만 되고 말았다.
아무튼 2차 십자군은 수개월이 걸려 십자군 왕국에 도달해서 적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들 싸움에 경험이 없었던 왕들인지라, 단 4일간 전투를 해보고 안되겠다 싶어서 군대를 물린다. 그렇게 싱겁게 2차 십자군은 끝난다. 전쟁의 목적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할 것이 많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전쟁에 나섰으면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고 지든 이기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2차 십자군은 4일만에 군대를 물린다. 어쩌면 처음부터 전쟁을 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갑(甲)이 시키니 못이기는 척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너무나 쉽게 전투를 포기하고 온 2차 십자군의 이야기를 듣고, 베르나르두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이 좋게 보시지 않은 사람들이 갔으니 실패로 끝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2권 p.116)'
당대 유럽의 최고 종교지도자가 했다는 말의 수준이 이러하다. 이런 베르나르두스를, 당시 교회에서는 사후에 '성인'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최고의 종교지도자가 되고,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현실이 우울한 것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사람이란 존재가 원래 그런 것인지도. 설령 종교지도자라 하더라도 원래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신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단 말인가.
1차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에 성공하고 십자군 왕국을 세우게 된 때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후 이슬람측에서 반격을 하여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에데사를 잃는다(이슬람입장에서 보면 빼앗긴 자기 땅을 되찾은 것이다). 그 때 그리스도교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신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단 말인가...'
누구나 살면서 어려움에 겪으면, 이런 탄식을 하게 된다. 그 당시 도시를 빼앗긴 후에 이런 반응은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직접 겪어보지 않는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다만 출발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은 해볼 수 있으리라 본다. 싸움을 통해 다른 나라의 땅을 빼앗으려는 시도, 더군다나 '신의 이름'을 빌려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신은 자기의 이름을 빌려줄 의도가 없었는데, 베르나르두스를 비롯한 사람들 측에서 신의 이름을 '멋대로' 빌려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지위 유지, 경제적 정치적 문제 해결)를 위해 사람들을 선동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든다.
조금 냉철하게 보자면, 처음부터 신의 뜻이 아니었는데 신의 뜻이라고 믿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경우 일이 잘 되면, 일을 기획한 자신들에게 성공의 공을 돌리고, 실패하면 신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인간들의 모습이 아닐까...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언뜻 보기에 33세의 나이에 사형당하고, 모아놓은 재산, 남겨놓은 자식 없이 처절히 실패한 것으로 보임에도 스스로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음을 생각해본다면, 세속적인 성공을 신앙이 좋다는 것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세속적인 실패를 좋은 신앙과 연결시키는 것도 사람의 본성으로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윤동주는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썼던 것일까...
과연 이교도들을 죽이고 땅을 정벌하는데에 신의 뜻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가장 큰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기에, 나는, 신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내가 따르지 못함을 알고 있을 뿐...그렇게 보면 베르나르두스 같은 사람을 비판할 자격같은 건 처음부터 나에게 없는 것이기는 한데...
4. 무신론자의 입장
저자는 이슬람의 태수였던 '우사마'라는 사람의 글을 잠시 소개한다. 이슬람의 수도승들이 고행을 하며 평온하게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신을 만나고 있다는 깊은 평안속에 있는 것을 직접 보고 감동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부분을 옮겨 적으며, 저자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간의 갈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푸념(?)을 털어놓는다.
'이토록 경건하고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왜 싸워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앙으로 인한 전쟁이 끊인 적이 없는 것이 인간 세계의 현실이다...(p.236)'
그렇다. 모두가 경건한 신앙인이다. 존경할 만하며, 사랑할 만하며,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과 다른 부분을 마주치면 갑자기 무섭게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갈등이 작으면 개인간의 갈등에서 멈추는 것이고, 조금 커지면 조직이 분열하고, 더 커지면 국가간의 갈등이 되는 것이다. 처음엔 이런 갈등에 무척 당황하였으나 천천히 생각해보니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인간 세계의 현실' 인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을 스스로가 알고 있느냐, 스스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일 뿐...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광신적이 됨이 없이 투신하게 하며, 밍밍하지 않으면서도 편견이 없는 정신'을 가지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5. 마지막 씁쓸함
교회가 가진 역사적 과오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볼 수 있을까 해서 책을 읽었는데, 마음 한편으로는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인가...하는 씁쓸함이 남는다. 어쩌면 파스칼의 표현처럼, '인간의 절망'을 깊이 느껴야 신에게 더 가까이 갈수 있는 것인지도. 그리고 어쩌면, 내가 역사적 사건 및 다른 사람들의 일을 보고 씁쓸함을 느낀다는 것이, 아직 나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위로하는 것의 반증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내게는 '절망'적인 일이다. 절망스러움을 모르고 있기에 절망적이지 않은가.
'독후감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와 벌, 도스또예프스키 지음, 홍대화 옮김, 열린책들 (0) | 2014.06.04 |
---|---|
전원 교향악, 앙드레 지드 (0) | 2013.02.13 |
[책]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중간독후감 (0) | 2013.02.13 |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R.M. Rilke, 고려대학교출판부 (0) | 2013.02.13 |
[책] 간디 자서전, 함석헌 (0) | 2013.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