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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문학

[책] 부활, 톨스토이

1. 톨스토이와의 공명(resonance)

 

  '숫자'에 불과하다는 나이가 한살씩 쌓일 때마다 변하는 게 한 가지 있다면, 문화에 대한 생각이다. 전에는 세상의 문화를 순전히 내가 즐기는 도구로서만 봤다면, 지금은 그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 특히 하늘로부터 재능을 부여받고 그 재능을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역사상 길이 남을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내게는 음악에서 바흐, 베토벤, 모짜르트 같은 인물들이 그러하다면, 문학에서는 톨스토이가 그런 인물이다. 그들의 위대한 점을 새삼 이야기할 것 까지는 없지만, 그들의 작품을 대할 때 이미 수 세기 전의 인물인 그들로부터 내게 전해져 오는 감동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보고 싶다.

  물리학 용어로 '공명(共鳴, 맞울림, resonance)'이라는 것이 있다. 외부에서 같은 주파수의 힘이 오면, 그 힘을 받아서 진동계의 진폭이 커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나는 예술에서도 '공명'현상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발표된 지 수십년, 수백년이 지난 작품에서 감동이 느껴진다면, 그것을 시간과 공간적 거리의 장애를 받지 않고 일어나는, '예술적 공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난 주,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부활'을 읽고 '예술적 공명'을 느꼈기에 정리해본다.

 

2. 부활, 그리고 세속화

 

  간략한 줄거리: '네플류도프'라고 하는 젊은 장교가 가정부였던 '카츄사'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그가 육체적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카츄사를 임신시킨다. 미혼모가 된 카츄사는 직장이었던 집에서 쫓겨나 화류계로 빠져들고, 아기는 태어나고 얼마 있다가 죽게 된다. 카츄사는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는데, 이런 사실을 네플류도프가 우연히 알게 되고, 한 때 사랑의 감정을 품었던 카츄사가 타락하게 된 것에 책임을 느껴 그동안 누리던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제목을  왜 '부활'로 정했을까... 결론적으로 긴 소설 속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는-내 기억으로는- 단 한번 나오는데, 네플류도프가 자기의 잘못으로 화류계로 빠진 카츄사를 '부활'시키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소설속 문장으로 생각해보면 '(카츄사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의미로는 '(네플류도프의) 부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의 욕정 때문에 사랑했던 여인의 삶이 파멸된 것을 보고, 그에 대해 큰 책임을 느낀 '네플류도프'가 그동안 추구하던 세속적인 권력, 쾌락을 버리고 '카츄사'의 상처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쏟으며, 카츄사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도 카츄사와 같은 위치가 되고자 한다.

 

"그는 자기를 그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18세의 소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의 그 젊고 순수하고 한없이 위대한 미래의 가능성에 넘쳐 있었던 시절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와 동시에 자기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으며, 그 옛날의 일들은 모두 실재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자, 무섭도록 서글퍼졌다......"

 

   반면, 소설 초반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소설속 '부활'의 의미가 아니라 그 역(逆)의 과정, 굳이 말하자면 세속화 내지는 타락(적절한 용어인지는 모르겠다)이었다. 네플류도프는 집에서 친척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카츄사와 우연히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젊은 남녀 사이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감정이다. 문제는, 군대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네플류도프에게 나타난다. 카츄사는 아직 풋풋했던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군대에서 충분히 세속화된 네플류도프에게 카츄사는 '쾌락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결국 카츄사를 힘으로 제압해 관계를 가진다. 그 이후 카츄사 또한 충분히 '세속화'되고 만다.

 

  군대에 있으면서 네플류도프가 변한 것은 카츄사에 대한 감정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토지제도에서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되어있는 점을 직시하고, 농민들을 위한 토지개혁을 준비했던 네플류도프는 처음에 순수하게 농민을 위할 땐 생각하지 않던 자신의 소유권도 생각하게 된다. 아마 이런 과정을 '세속화'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네플류도프의 생각의 변화를 따라가며, '그렇지... 사람은 살다보면 그렇게 되지... 그런 모습을 권장할 수는 없어도, 남에게 피해만 안 준다면 비난할 수는 없는 과정이지...'라고 어느덧 동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수입은 그 노예 제도 위에 존재하고 있고, 그 자신도 그러한 제도에 협력하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잔혹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현대의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여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해 준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가 군인생활을 하면서 1년에 2만 루블이나 되는 큰 돈을 낭비하는 습관이 생기면서부터 이러한 인식은 그의 생활을 위해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동료들과 경쟁을 하면서, 경제활동을 통해 돈을 만지게 되면서, 그리고 내게 주어진 능력과 시간 이상의 일을 해야만 되는 상황에 수년간 있으면서 '세속화'된 것 같다(세속화가 꼭 나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만큼 변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경쟁을 하는 시대에 살면서, 더군다나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더 뛰어나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고, 더 즐겁게 살고 싶은 욕심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기에 어느 정도 '세속화'되는 것을 정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피할 수도 없는 것 같다. 다만, 어렸을 때 순수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아쉬움인지, 씁쓸함인지 혹은 그리움인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내가 소아과를 전공하기로 한 계기 중에 하나는, KBS한민족리포트 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던 어느 소아과 선생님의 이야기를 본 것이었다. 소아과 개원의 생활을 하시다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를 통해 '서사모아'라는 남태평양의 섬나라에 가셔서, 그 곳 유일의 소아과의사로 일하시는 최영진 선생님의 이야기를 보고 큰 감동을 느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내과와 소아과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소아과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다. 8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소아과의사가 되었지만 '세속화'되어 버렸다...그리고 이제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은 자도 바보요, 나이 들어서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자도 바보다'라고 했다는 철학자 칼 포퍼의 말에 기대어, 세속화된 현재의 나를 합리화하려고 할 뿐이다...

 

3.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민

 

  소설속 인물인 ('부활'前) 네플류도프에게서 느껴지는 나와의 공통점만으로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니다. 나를 공명시켰던 것은 톨스토이의 세계관이다.

 

"이따금 느끼게 되는데, 자기에게는... 다른 사람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그 문제의 의의를 나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왜 고모들은 살고 있었을까? 왜 나는 살아 있는 것인가? 왜 카츄사라는 여자가 태어났을까? 나는 왜 몹쓸 짓을 했을까? 왜 전쟁이 일어났을까? 그 후의 나의 방종한 생활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 즉 조물주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조물주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내 힘으로 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그 무서운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방도는, 사람들이 항상 하느님께 대하여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 인식하고, 따라서 자기에게는 절대로 남을 벌 준다든가 고쳐줄만한 힘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되었다...'

 

 '오늘까지 그가 간절히 찾아다녔던 해답은 실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해 준 그 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사람은 죄 없는 자가 없는 것이며, 그에 따라 사람을 벌주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몇 번이라도 끝없이 용서해야만 한다는 , 그 한 가지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가능하면 내가 접한 기독교 신앙 안에서 그것을 찾고자 하였다. 오랜 고민 끝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바로 톨스토이가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그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판단(비난)할 자격이 없다...' 톨스토이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했으며, 더군다나 같은 해답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물론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어떤 사실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여전히 매일, 다른 사람을 판단(비난)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네플류도프의 말처럼, 나 역시 위선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자신이 수치심에 사로잡혔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에 대해서는 그 권리를 인정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일부분을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던 것이다'

 

4. 문제 해결 방법

 

  카츄사와의 문제, 토지개혁에 대한 문제,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않는 관료들의 문제, 세속화된 교회의 문제 등에 대한 톨스토이의 인식은 내 생각과 많은 부분 일치했지만, 그에 대한 해결방법에서는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좋은 제도를 만들긴 해야 하지만, 사람의 마음에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문제의 본질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은 누구나-거의 대다수가- 기득권을 위해 경쟁하며, 기득권을 얻은 자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득권이 없는 자는 기득권을 얻기 위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네플류도프처럼 자신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식의 방법도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분배받은 사람중 누군가, 혹은 제도의 헛점을 발견한 누군가가 기득권을 가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가 필요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다만 더 좋은 제도는 있지만, 완벽한 제도는 없을 것이다. 설령 완벽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천국에서만 가능한 제도가 아닐까?

 

5. 마치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이반' 같은 단편집을 통해 매력을 느끼게 된 작가 톨스토이는,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직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보다는 톨스토이의 작품이 내게는 더 잘 맞는 듯 하다. 소설 전반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드러나있고 결말에는 직접 마태복음을 인용해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마치 한 편의 설교를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중에는 공감가는 내용도 많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의 문제, 삶에서 부딪힐 법한 문제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전개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높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