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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칼 융의 심리학과 종교 읽기, 김성민


칼 융의 심리학과 종교 읽기

저자
김성민 지음
출판사
세창미디어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융은 신학자나 종교학자와 다른 관점에서 종교적 인간(homo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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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자라면서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어릴 때는, 왜 우리집은 시골에 가난한 집인가 같은 질문이었는데 이 질문은 보다 구체적인 몇 개의 질문들 이를테면 왜 625전쟁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왜 나의 할아버지가 납북되었고,  그로 인해 내 아버지는 학교다닐 나이부터 일을 하며 가장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나는 왜 그런 집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십대 후반부터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그러면서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은 교회쪽으로 공이 넘어가버렸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 왜 내 삶이 답답할까, 다른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것 같고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데 왜 내게는 그런 인식이나 경험이 없을까,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지만 그들도 대부분 진심은 아닌 것 같은데... 같은 질문들이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질문도 몇가지 있었다.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인 조선시대, 고려시대에 태어났던 사람들은 무조건 지옥에 가야 되나요? 태어나보니 중동땅이고 주위에 이슬람사원뿐이어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의 죄인가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이교도는 악마를 믿는 사람들인가? 같은 질문들이었는데, 이런 토론주제가 나오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지옥에 간다' 내지는 '그러기에 열심히 선교해야한다'는, 뭔가 해결되지 않은 듯한 대답을 하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사실 잘 모른다.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가면 그때는 알게 될지도 모른다'며 솔직해보이는 대답을 하기도 하였다.


요즘처럼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 맹렬한 사회를 보면서는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기독교를 개독교라며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을 가만히 보면 종교가 아닌 다른 대상을 열렬히 '종교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쓸데없이 만들어놓은 미신인 것처럼 말하면서, 때로는 종교를 없애야 지상낙원이 도래할 것처럼 비난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대상만 종교가 아닐 뿐 특정 정치집단이나 특정 이념 혹은 물건(돈, 자동차, 가방, 시계 등)에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때로는 그것들에 휩쓸려다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모든 인간은 믿는 대상만 다를 뿐 본성이 종교적인지도 궁금했다.


이런 질문중에 많은 것들은 살면서 의문이 풀렸다.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때로는 돈이 많기 때문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그와 동시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이었으며 그것이 내 인생에 축복이었다는 것을  인식한 어느 순간부터는 질문이 저절로 풀렸다. 교회에서 믿음이 좋아보이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그들도 믿음이 없어서 고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부터는 믿음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의심이 동반될 수 밖에 없으며 때로는 의심 덕분에 믿음이 분명해진다는 것, 즉 의심은 믿음의 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면서 또하나의 큰 질문은 더이상 힘을 잃었다.


'죽음 이후의 천국행 티켓'을 얻는 목적으로서의 신앙생활에 대한 의문도 어느정도 풀렸다. 내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구원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의 요소를 자신의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것이다.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구원에는 이런 의미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요소가 없이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면, 즉 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의 요소를 내 것이 아니라고만 한다면 악은 언제나 내 밖에만 보인다. 그러기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다른 국가, 다른 종교가 악으로만 느껴진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을 예로 들자면, 바울은 구원 받기전에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절대악이라고 생각하고 핍박을 하였으나, 구원 받은 이후에는 스스로를 죄인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다. 그러기에 구원을 받는 것이 죽음 이후의 천국행 티켓을 얻는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 안에 있는 악의 요소를 받아들여야만 내게 구원이 도래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달리 읽힌다.


이런 생각을 15년전 스무살의 나에게 설명해준다면 그 당시의 나는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10년 20년 더 지나서, 인생의 중년 노년으로 접어든 미래의 내가 그동안 얻은 지식과 깨달음을 지금 37세의 나에게 설명해준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이해 못할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마치 초등학생이 만난 어려운 수학 문제를 대학생이 대신 풀어주고 답은 이거야 하고 가르쳐준다면, 그것은 초등학생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면 스무살의 나는 복음을 '예수를 믿으면(믿는다고 말만하면), (사후에 천국에 갈)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던 것 같고, 지금의 나는 '내 자신에 있는 악의 요소를 그리스도 예수의 도움(힘)으로 회피하지 않고 대면해가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무살의 나와 지금의 나 둘중에 누가 구원을 받은 것인가. 이 대답을 과연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교리에 대한 비판 없이 따지지 않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믿음이 좋은 것이므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혹은 교리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이해를 깊이 해야만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둘 중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과연 누가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의 구원은, 복음에 대한 이해의 깊이 여부와는 큰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사람은 이전보다 더 알았다는 것이지 결코 완전히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종교란 그렇게 알 수 없는 것과 알 수 있는 것을 이어주는 통로인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고 답을 알게 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사람이 완전히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이제 신의 문제에 다가갈 때 존재론적인 접근보다는 현상학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접근보다는 신적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p.175)'는 융의 말처럼, 또 '이성의 최후의 한걸음은 이성을 넘어서는 무한한 사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모든 질문을 사람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질문을 던진 이가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사람이 구원에 가까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