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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 오래된 미래

 


노년의 기술

저자
안젤름 그륀 지음
출판사
오래된미래 | 2010-07-1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세계적 영성가 안젤름 그륀 신부가 말하는 노년의 삶이 책은 ‘노...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젊은이는 삶을 두려워하고 늙은이는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말처럼, 점점 중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는 내게 다가올 삶이자 미래인 노년을 두려워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나이들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책을 구입했으나,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어느정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는 끊임없이 바라는 것들이 생겨나고, 그것이 성취되지 않거나 혹은 성취를 막으려는 것이 나타날 때마다 나는 여전히 괴로워한다. 단지 몇 시간을 할애해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그런 괴로움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책은 언뜻 노년이 된 신부(세계적 영성가라고 하는)의 잔소리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문장 하나하나를 저자가 살면서 경험하고 고뇌한 끝에서 나온 문장이라고 생각하면, 노인의 잔소리가 아닌 보석과도 같은 깊은 깨달음의 문장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인생에서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나인가?

이 모든 질문이 향하는 곳은 결국 내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신이다. 신을 근간으로 인생의 집을 짓는다면 일이나 직장에서의 역할이 사라져도 그 삶은 흔들리지 않는다(p.55)'


생각해보면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고 느꼈던 20대 초반까지는 내 스스로 이런 질문을 참 많이도 던졌다. 이에 대해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던 기독교를 무능력하다고 여긴 시간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내가 소유한 것들-사실 소유했다고 착각한 것들-이 조금씩 쌓이면서 이 질문을 던지는 횟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부자로 살까, 혹은 먼저 기득권을 가진 사람처럼 나도 기득권을 갖게 될까 하는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이 질문을 다시 책에서 접하고 나서 내 머리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나하면, 신부님이 던진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스스로도 이미 깨달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이 질문을 던졌으며 그 때마다 얻은 대답도 신부님이 답한 대답과 같았다. 그러던 것이 여러가지 성취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질문 던지는 법 자체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성취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큰 성취를 바라는 질문만 갖게 되고, 신부님의 질문은 점차 잊혀졌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더 큰 성취만을 추구하느라 내 삶에 있는 울렁증의 진폭은 더 커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울렁증의 진폭이 커지다 보면 더 우왕좌왕하며 살게 되고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안정되어 있지 않고 흔들리나'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이러한 울렁증의 진폭을 잡아주는 대답은 바로 '내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신'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크게 울렁거리던 인생이라는 항해는,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 항해로 바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삶의 울렁증에 대해서도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 전까지는 그 무엇이든 완벽을 추구하고 유토피아를 바랬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는 이렇게 우왕좌왕하지 않겠지 하는 바램으로 책을 많이 읽어보기도 하고 기독교에 깊이 몰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해 큰 불만을 갖기도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어느 정도는) 흔들리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완전한 모습으로서의 정상이 아니라, 충분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데에 의미를 둔, 굳이 표현한다면 '완전함'보다는 '온전함'을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융의 표현대로 하면 '충분하지 않은 진실'이다. 


시편62편에서 다윗은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20대에는 이 시편에도 불만이 있었다. '크게 요동치 않는다'는 부분을 나는 '어느정도는 흔들린다'고 읽었는데(이 해석이 신학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다), 그 부분이 불만이었다. 하나님이 산성이고 반석이고 구원이라면 아예 흔들리지 않아야지 왜 흔들리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구절을 참 좋아한다. 어느 정도는 흔들리는게 정상이었던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는 항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면서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이상 감사할 조건이 있을까. 크게 흔들리지 않는 항해가 더욱 항해다우며, 충분하지 않은 진실이 더욱 진실되다는 것을, 이제는 어렴풋하게 깨달아간다. 아마도 은연중에 나는 완전한 노년생활을 바래왔나 보다. 생각을 정리하니, 완전한 노년생활은 없다. 적당히 흔들리는, 충분하지 않게 진실되는 노년이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노년을 위한 기술은 현재를 사는 기술과 같다. 초중고를 다니던 나는 내가 언제 어른이 되나 싶었는데, 이제 정신을 차려보니 서른 중반을 넘기고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다. 내가 이렇게 빨리 아이아빠가 되고 남편이 되고 가장이 될 줄 과거의 나는 전혀 몰랐었다. 아마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삶이 나에게 축복해준다면- 나는 어느덧 노년이 되고 할아버지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 때의 나 역시 이렇게도 빨리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줄 그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노년을 위한 기술은 따로 있다기 보다는,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술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오랜 시간에 걸쳐 수천km에 해당하는 지구여행을 한다고 했을 때, 지구의 둘레를 따라 먼 길을 지나왔음에도 지구 중심으로부터는 조금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것처럼, 한참의 세월이 지났어도 어릴 적의 나와 노년의 나는 크게 차이가 없으며 내 마음의 중심도 그대로 일 것이다. 그러면 결국 무엇이 의미있는 것일까. 지구의 둘레를 따라 여행하면서 길가에서 보고 들은 것, 대자연을 보고 느꼈던 감동, 여행 도중에 느꼈던 피곤함과 배고픔,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 뻔한 두려움 및 그 밖에 모든 경험했던 일들이 기억에 남는 것처럼,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모든 일 자체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내 마음의 중심-칼 융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Self-에서 단단히 붙잡아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