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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끝나지 않은 여행, M. Scott Peck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ed, Morgan Scott Peck


'아직도 가야할 길 The Road Less Traveled'의 후속으로 나온 책,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끝나지 않은 여행'을 다시 읽었다. 그렇다. 이 책도 내가 기독교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사실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인줄 알고 읽은- 20대에 멋모르고 읽었던 책이고, 그 책을 지금 37세가 거의 다 지나가는 무렵에 다시 읽었다. 이십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스무살의 나로서는 크게 와닿지 않던 내용들이, 내 가슴을 울리는 문장으로 가득하게 변하는 마법이 일어나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내 마음을 흔들어, 잠시 책을 덮어놓고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없게 만든 부분은 '영적 성장의 단계'이다.


'영적 성장의 단계'라고 하면 먼저 '얼마나 고고하고 높은 경지에 이르는지'를 구분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정신과의사 스캇 펙 박사의 관찰결과는 한국식 기독교인의 통념과 다르다. 책 152쪽-160쪽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간단히 표현하자면 1단계는 '혼돈/반사회 단계'로서 영성이 없어서 원칙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 2단계는 '형식적/제도적 단계'로서 자신에 대한 통제를 교회라고 하는 제도에 의존하고 있어서 종교적인 형식에 매우 집착하는 사람들, 3단계는 '회의적/개인적 단계', 4단계는 '신비적/공동체적'이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행위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신을 외적인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이 얼마쯤은 우리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인간의 영혼 안에 신이 주재한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이들은 신을 마치 하늘에 있는 자비로운 경찰 쯤으로 보고 있다. (p.157)


3단계에 있는 사람들(의구심이 많은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은 비록 일상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2단계에 있는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앞서 있다......주로 이런 사람들은 과학자들이거나 과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다. 변함없이 이들은 진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들이 내가 제시한대로 충분히 넓고 깊게 추구했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찾기 시작해서, 진리의 조각들이 충분히 짜맞추어져 전체적인 그림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 모습은 당연히 아름답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 단계에 있던 부모들이 나 조부모들이 믿었던 원시신화나 미신을 닮아 있다. 바로 그 순간에 이들은 내가 '신비적/공동체적'이라는 이름을 붙인 4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p.159)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과 똑같은 대상들을 믿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들이 너무나 두려워하는 자유를 가지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p.162) 


스무살의 나는 2단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 자유롭고 싶었지만 자유롭지도 못했고, 그대신 기독교를 믿기에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었다. 기독교의 형식(이를테면 주일성수, 십일조, 금주 등)을 지키려고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경 암송을 열심히 했으며, 매일 아침에는 QT를 하려고 노력했고, 매일 저녁엔 교회 기도실에서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도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다는 메시지를 누군가 해주었지만, 그게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아 괴로웠었다. 열심히, 정말 많은 기도를 했지만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다 건물에 막혀서 올라가지 못한 것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럴때마다 '믿음'으로 기도가 하늘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믿으려' 애썼다. 하지만 기도대로 이루어지 않는 현실을 보며 많은 좌절감을 느꼈었다. 아,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해야, 열심히 도를 닦아야 하늘 위에까지 닿게 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스물여섯, 응급실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2단계에 있던 신앙은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주일(일요일)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날이라고 배웠는데, 응급실에 아픈 사람은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오기 때문이다. 아니, 일요일의 대학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오는 정도가 아니라 그나마 상황이 나을 때가 도떼기시장, 상황이 안좋으면 아비규환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기독교인인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환자를 보기 위해 응급실에? 2단계의 신앙의 관점으로는 두 가지가 서로 배치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2단계 신앙은 균열이 나 버렸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에 직장생활을 하는 '죄'를 어쩔수 없이 지은 다음, 가능한 그 상황을 탈출해서 상황이 나아지면 평일에 근무하는 곳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 '믿음의 선택'이라고 장려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일년 365일중에 여름휴가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358일을 출근해야 하는 소아과 전공의 시절, 적어도 내가 이해했던 기독교 신앙으로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도움보다는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독교가 현실을 풀어내지 못하는 종교이거나, 내가 잘못 이해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그 당시 다니던 교회도 2단계의 문화가 지배적인 교회였다. 현실에서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의문들을 그 교회는 감당하지 못했다. 나도 그 교회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 교회는 생각의 자유를 버리고 복종해야 복음안에서 자유롭다고 이야기 했고, 나는 생각의 자유를 인정해주면 충분히 자유를 누린후에 다시 복음 안으로 돌아와 자유롭게 될 거라고 했다. 서로의 의견은 평행선을 이루었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된다는 말처럼, 내가 떠났다. 그때쯤 라브리선교회를 알게 되었는데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표방하는 그 곳이 끌리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스캇 펙 박사의 표현대로 하면 '은혜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3단계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내가 전공한 현대 의학, 그 중에서도 특히 뇌과학에서 종교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도 그 연장선 상에 있었다. 과학을 충분히(완전히가 아니라 충분히) 공부하고 나니, 과학의 한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성으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믿고 과학을 공부했는데, 과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성을 넘어서는 무한한 신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스캇 펙 박사는 선불교에서 역설을 먼저 배우고 기독교를 접하게 되어 기독교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칼 융의 분석심리학을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분석심리학을 공부한지 3-4년 정도 지났는데 분석심리학 덕분에 이전에 내가 배웠던-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이해했던-기독교 교리에는 훨씬 더 큰 진리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진리는 2단계에 있을 때 보고 들었던 것과도 비슷하다.


사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2단계와 4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치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 두가지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점이다. 

'예수는 나의 구주'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말인데 이것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말은 예수야말로 자신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한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요정같은 후견인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맞는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해줄 것이다. 반면에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가 삶과 죽음을 통해서 스스로 각자의 구원을 위해서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역시 맞는 말이다. (p.161)


예수의 존재와 의미, 구원의 존재와 의미, 죄의 존재와 의미... 이러한 기독교 교리들에 대해 내가 10대,20대에 이해했던 의미와, 인생 중반을 넘어서 이제부터 이해해 나가는 의미가 각각 다르다. 내 개인의 역사에서 벌어지는, 성경에 대한 재해석이다. 각각의 해석은 서로 완벽히 독립적으로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같은 본질을 설명할 것이다. 그래서 그 역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감사와 기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 길은 '아직도 가야할 길'일 것이며, 그러기에 '끝나지 않은 여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