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종교 & 철학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로버트 A.존슨 지음/고혜경 옮김

내일 모레면 마흔이다. 스스로 소년이라고 생각했던 어느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사랑에 빠졌었고, 또 어느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키우고 생업을 위해 매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아직 소년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도 세상은 한참전부터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마음 속을 천천히 흩어보면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소년의 풍모가 남아있을 터인데, 외모로는 이미 한참전부터 아저씨이며, 남편이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다.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여기에다 '아이와 잘 놀아주고 육아에도 관심이 많아야 하는 아빠'라는 짐도 은근슬쩍 내 어깨위에 올려놓았다. 또 어떤 가정, 어떤 사회에서는 휴가나 연휴때마다 '(아빠는 좀 희생을 해서라도) 가족을 위해 돈과 시간을 내어 해외여행을 가서 힐링의 시간을 마련해주어야 하는 좋은 아빠'라는 짐도 짊어진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아내를 잘 만난 덕인지 다행히 내 어깨 위에는 그런 짐은 없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소년이라고 생각했던 어느 순간부터 남들은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왔으며, 내 스스로 당연히 아저씨라고 생각하고 있을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를 것이기에, 아저씨라는 호칭 자체는 별로 서럽지 않다. 다만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르게 되지 않는다는, 이른바 '불혹(不惑)'의 나이가, 한참 남은줄로만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코앞에 닿았다는 것은 좀 당황스럽다. 아직 나는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아마도 내가 흔들리는 큰 이유는 어깨위에 얹혀진 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중에 로버트 A. 존슨이 쓰고 고혜경씨가 번역한 책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충분히 흔들리고 있는 내게 큰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인생은 원래 충분히 흔들리는 것-흔들리는게 정상-이라는 사실을 공감해주었으며, 흔들리는 그 위에는 무거운 짐이 있지만 밑에는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있어 대지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다는 것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 유토피아를 떠나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이제는 젊을 때 그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고독을 즐긴다"고 말했다(p.84). 인류역사에 손꼽힐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에게도 젊은날은 고통이었나보다. 사실 많은 어른들은 아인슈타인처럼 대단한 업적과 명예를 가지면 인생이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실제로 아이들에게도 아인슈타인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사람보다 공부를 잘해야 된다고 얼마나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가.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치는 또 얼마나 많은가. 많은 부모의 선망이었던 아인슈타인마저 그의 젊은날 힘들었던 것이 고독이었다니...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젊은 날에 고독을 느꼈던 이유, 그리고 고독으로 힘들었던 이유는 그가 어린시절 바랬을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기대했던 어린시절의 세상은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이나 어느 시기부터, 추측하건데 의식이 선명해지는 13-14세 무렵부터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하기 시작하면서, 또 뜻대로 되는 경험을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된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행복은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는 고독을 느꼈을 것이며 고독과 싸우느라 그는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그의 위대함에 환호한다 하더라도, 그의 내면의 고독은 아무도 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그의 고독을 풀어준 것은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 아침에 따스하게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 혹은 산들바람이나 길가에 핀 들꽃 처럼 사소해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로버트 존슨은 '젊은이들이 세상은 행복과 환희로만 채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p.18)'라고 말한다. 나 역시, 아니 모든 사람은 젊은 날의 어느 순간부터 세상은 행복과 환희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그 과정은 성경의 눈으로 보자면 마치 에덴동산을 나오는 것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이미 겪어온 사람은 아직 겪지 않은 사람을 씁쓸하게 바라본다. 에덴동산(유토피아)에 있을 때가 좋았지.... 혹은 에덴동산(유토피아)가 있다고 믿을 때가 좋았지...하고 말이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다보면 혹은 너무나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보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살아가면서 겪을 쉽지 않은 인생의 경험들이 벌써부터 안타까워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잃어버린 성배의 성(TheGrail Castle lost)

 

하지만 삶이 그렇게 무미건조하기만 혹은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극의 대척점에 희극이 있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잠깐이라도 웅장하고 환희에 찬 무언가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 나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는 사건을 경험한다. 나도 그런 경험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첫번째 경험으로는 스물두살 때 해남 땅끝마을로 여행갔을 때이다. 2000년 2월 대학 친구들과 같이 넷이서 대둔산에 위치한 대흥사를 찾아가는데(그 때는 몰랐지만 이 친구들중 한명이 내 아내가 된다), 절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대흥사 뒤편에 넓게 펼쳐진 눈덮인 대둔산의 설경을 보고, 내 마음속에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이 나를 사로잡았다. 두번째 경험은 강원도 양양의 바다에서였다. 2003년 겨울인가 강원도 여행을 가서 마지막에 낙산해수욕장의 바다를 보러 갔는데, 큰 파도가 치는 겨울바다는 웅장함이라는 세글자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광활하고 힘이 넘치는,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이 경험들의 공통점은, 내가 예상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마치 책 속의 표현처럼 '왼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 보니' 있던 것처럼 우연하게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후 20대를 살면서 그 순간의 경험을 되뇌이고 다시 만나기를 기대했지만, 바쁘게 사는 일상에서는 한동안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비슷한 경험을 다시 하게 된 것은 2009년이었다. 보은군에서 매일같이 산책하던 논두렁에서, 매일 스치며 숱하게 보았던 평범하게 피어있는 들꽃이 대자연에 뿌리내려 살고 있는 생명력을 전해주었을 때 신비로운 편안함, 깊은 안정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대둔산과 동해바다가 준 감동과 차이가 있다면 웅장하기보다는 어머니같은 한없는 안정감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더 최근의 경험으로는 2014년인가 5월의 어느날, 장미공원의 소나무숲에서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음악속에서 내 영혼 가장 깊은 곳의 무언가와 닿게 되는 듯한 경험도 있다. 사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는 그런 경험을 꽤 자주했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닌 것 같은데, 클래식 동호회 '고 클래식'의 글을 읽다보면 사람들이 바흐의 음악을 듣고 나면 신비한 경험을 하며 피곤이 풀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부는 피로회복제 박카스에 빗대어 '바흐카스'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도 피로회복제로서의 '바흐카스'를 카페인음료 '박카스'보다 선호한다. 이런 경험은 신화에서도 등장하는 모양이다. 로버트 존슨은 '성배'로 상징되는 이런 경험에 대해 이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남자들은 대부분 온 세상이 광채를 발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충만했던 젊은 날의 그 마술 같던 삼십 분을 잊지 못한다. 그게 일출이든, 경기장에서의 환희에 찬 한 순간이든, 홀로 나선 고독한 산행길에서 모퉁이를 돌 때이든 눈앞에서 내면세계의 장관이 펼쳐진 순간이다(p.74)'

 

하지만 이런 경험을 마술같은 삼십분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질문을 제대로 던져야 된다. 그 질문은 정직하면서도 바보스러운 그러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온 질문이게 된다. 그리고 로버트 존슨은 그 질문을 던지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첨언을 한다.


'제대로 이런 경험을 하려면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먼 길을 가야 한다. 성배의 체험에 지름길이란 없다(p.83)'

 

아마도 이런 경험은 젊은 날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간간히 주어지는 오아시스 같은, 가뭄에 내리는 소나기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하지만 말그대로 잠시 목을 축여주는 정도의 경험일 뿐이라서, 살면서 느끼는 무언가에 대한 깊은 갈증, 해결되지 않은 답답함, 불안감은 씻은듯이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그것을 미처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은 로버트 존슨의 표현처럼 '토요일 밤의 흥분', '시속 150km로 달리는 스포츠카' 혹은 술, 조금 더 나아가면 마약 같은 것들에서 찾게 되는 것 같다. 그것들도 갈증을 잠시 해결해줄 뿐이다. 하지만 힘들어도 기다려야 한다. 성배의 체험에 지름길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속성코스만 수료하면 삶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광고'하는 것들은 내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내 곁에서 묵묵히 기다려줄 수 있는 것들이 내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자연처럼 말이다.

 

*** 다시찾은 성배의 성(The Second Grail Castle)

 

출구 없는 스트레스, 풀리지 않는 답답함,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한동안 겪다보면 그 기간 내내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질문들이 하나 둘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삶의 현장마다 각기 다른 질문이겠지만, 그 질문의 끝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하나 남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질문에 도달하면, 신화에서처럼 역설적으로 문제는 서서히 풀리고 성배의 체험에 다다르게 된다. 내 경우 보은군에서 답답했던 상황의 끝에서도 마지막 질문을 하나 던졌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보은군에서 괴로웠던 서른살의 나에게,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를 보게 해준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동안 수없이 스쳐왔던 길가의 작은 꽃이 그날 비로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 꽃은 내 눈에 띄기 위해 숱한 비바람을 맞으며 자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처럼' 독후감 중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줄이면 "누가 들꽃을 만들었을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마주한 순간, 나를 괴롭히던 답답함은 눈녹듯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살면서 경험하는 많은 일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질문들, 그 질문 끝에 흐르는 단 하나의 본질적인 질문. 그 질문에 마주하게 되는 순간 인생은 바뀌게 될 것이다. 다만 그 질문에 마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파르시팔 신화에서는 20년의 세월이 지난후에 질문을 던진다고 나온다.

 

'참으로 놀랍게도, 이제 20년이란 세월의 원숙함과 경험을 쌓은 파르시팔이 인류에게 가장 크게 기여하는 질문을 던진다. "성배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p.113)'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를 풀어보려 애쓰면서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낙담하는 순간, 자아(ego)의 목표는 의미가 제대로 내포된 질문을 정확하게 던지는 데에 있지 그 대답까지 알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질문을 제대로 던지면 답은 이미 찾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p.116)'

 

역설적으로도, 그리고 괴롭게도 성배를 갖고 싶다고 해서, 혹은 무언가를 바란다고 해서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바로 주어지지 않을 뿐더러 오래 기다려도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정직하면서도 바보스러운, 그리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온 질문을 던져야 성배는 내게로 다가오게 된다. 그렇다. 행복은 내가 잡으려고 해서 잡아지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여러가지 즐겁고 괴로운 경험을 하며 살아가다 보면, 그래서 이 힘든 인생에서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면, 수많은 고민과 괴로움, 질문들 속에서 충분히 시간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 궁극적인 질문 하나가 내 속에서 올라오게 된다. 내 자아(ego)가 만들어낸 질문이 아니라 내 속 어딘가에서 올라온 질문이다. 내가 만들어낸 질문이 아니기에 우연히 온 것 같이 느껴진다. 그 질문이 올라오게 되면 행복이 주어지게 된다. 이 과정을 성경에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낸다'고 표현한 것 같다.

 

'우연히 뭔가를 이루게 되는 경우가 파르시팔에게는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가! 파르시팔의 여정이 보여주듯, 의식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단계들을 우연히 찾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p.100)'

'성배에게 행복을 달라고 요청하면 행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성배와 성배왕을 바로 섬기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행복이다.(p.116)'

 

여행은 누군가와 같이 가야 즐겁다. 간혹 혼자 가는 여행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런 여행도 내 마음속의 누군가와 같이 가는 것처럼 느껴져야 즐거운 여행이 되며, 처절하게 혼자인 여행은 힘들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인생은 철저히 혼자가는 여행이라고도 하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힘들다. 그러나 사실, 가만히 보면 철저하게 혼자인 것 같은 순간에도, 나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그 존재를 정확히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나 내 마음 어딘가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은 알 것 같다. 살면서 그 초월적인 존재와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으며, 그 느낌은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느 순간 그런 느낌이 다가올 때가 있다. 그 느낌이 나 혼자 살아가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같다. 융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아니마, 아니무스, 자기(self)'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는 것 같고, 신학에서는 '성령'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는 것 같다.

 

로버트 존슨이 쓰고 고혜경씨가 번역한 이 책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라는 책은, 사실 나 혼자인 것처럼 고독하게 살아가는 삶에다 대고 '너 혼자가 아니야.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겪고, 누구나 비슷한 여정을 겪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전공의 때 내 실력부족으로 실수를 연발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김동현선생님이 '누구나 그럴거란 믿음으로 사는거다'라고 말해준 것은, 사실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올라온 소리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소리 중에 내 삶을 지탱해주는 소리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