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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종교 & 철학

[책]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스캇 펙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In Heaven as on Earth



2004년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기 얼마전 마음이 착잡했던 나는, 기독교서점에 갔다가 '존 번연이 본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을 구입했다. 기독교인이지만 내세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에 혹시 그 책을 읽으면 죽음 이후에 대해 좀 더 확신이 생길까 하는 마음에서 구입했던 것이다. 얼마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이후에도 결국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아마도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육체적 죽음 이후에 유황불이 타는 곳에서 영원히 고통을 주는 곳'으로서의 지옥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 같다. 어디선가 본 무신론자들의 비아냥-기독교인들은 믿음을 갖고 천국에 가야된다고 말하지만, 정작 천국에 가기위해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도 그냥 흘려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무살 무렵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배웠다. 그 당시 나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가게 된다'고 이해했던 것 같다. '확신'이 있어야 된다고 들어서 스스로 확신을 가지기 위해 마음으로 수십번도 넘게 '나는 믿음이 있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되뇌였던 것 같다. 그래도 확신이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그러면 내 스스로 '아니야, 너는 확신이 있어. 또 그래야만 해'라고 다시 마음을 다잡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풀리지 않는 현실에서의 갈등과 어려움으로 힘들어했으며,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해달라는 바람으로 '믿음을 더 좋게 해달라'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해달라'는 기도를 여러번 했던 것 같다.


서른 후반이 된 지금 되돌아보니, 스무살의 내가 진실로 바랬던 것은 알수 없는 미래인 사후세계가 아니라, 당장 괴로웠던 현실에서의 구원이었다. 무언가 마음속에 있는 답답함, 자유롭지 못함, 사람들을 대할때마다 움츠러드는 마음, 남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별로 가진게 없다고 느껴지는 마음,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등. 맞다. 약간 과장하면 지옥같이 괴로웠던 때가 있었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그 당시에 힘든 기억 외에도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도 많았었지만, 그렇다고해서 힘든 시간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 어려움을 (사후세계의) 구원으로 풀어내려고 그렇게도 열심히 기도를 했던 것 같다. 현실을 회피했던 것이다. 문제는 살고있는 현실에 있는데,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것이다. 


회피하던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마주하게 된 것은 나이 서른을 지나면서였던 것 같다.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서 부양할 가족이 생겼고, 내가 바라던 진로대로 살아지지 않아 힘들었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게 없었다. 공중보건의로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지냈었는데,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과 내 경력을 쌓아가기에 도움이 안되는 곳에 있다는 것이 나를 힘들게 했었고, 논과 산과 하천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자연과 그 곳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즐길수 있는 마음이 없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가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겨왔었는데, 그 무렵부터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내 삶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작지만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에서 매일같이 산책을 하던 어느날 저녁, 논둑에 핀 민들레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나는 공중보건의생활을 내가 원하는 진로를 막아 방해하는 시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는 내게 전혀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한 들꽃일 뿐인데, 잠시 내 시선을 멈추게 한 그 꽃은 한없는 아름다움과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며 내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 순간의 감동이 마치 마라톤선수가 전환점을 돌듯이 내게도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이후 지금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고 즐거울때가 있으면 힘들때도 그만큼 많았지만, 그 때 길가에 핀 들꽃을 본 이후로 시야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 같다. 그 전까지는 내 자신을 화려한 장미 혹은 아름드리 나무처럼 크고 화려하게 살아야만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는 이가 없는 들꽃은 화려한 장미 못지않게, 아니 어떤 면으로는 화분속의 온실속의 화초보다, 대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있는 들꽃이 더 '잘 살고' 있다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추구했던, 내가 정말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 이후에 천국이 어떤 곳인지 지옥이 어떤 곳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에는, 천국은 영원히 즐겁기만 한 곳, 지옥은 영원히 고통스럽기만 한 곳은 아닐 것 같다. 천국에서는 기쁨과 더불어 (적당한) 괴로움이 있을 것이고, 지옥에서도 어느정도의 기쁨과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다만 천국에 간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살아가는 의미를 충실히 느끼며 살고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 천국에 수많은 '위원회'가 존재하는 것처럼. 지옥에서는 역시 다양한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지만 왜 이 곳에 있어야 되는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거나 혹은 기쁘지도 않은 일들을 하면서 스스로 기쁘다고 속이면서 혹은 남들에게 기쁜 것처럼 보이기 위해 힘들게 포장하면서 지친채로 살고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 쓰레기통으로 묘사된 작고 지저분하고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 그 곳을 찾아온 수많은 영혼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나는 천국에 가게 될까 지옥에 가게 될까. 그것도 알수 없다. 다만 복음서에서 하나님나라라는 용어는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것에 비해, 지옥이라는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성경의 관심,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은 '저 녀석을 어떻게 지옥에 보낼까'가 아니라 '저 영혼을 어떻게 하면 천국에서 살게 할까'인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없으면 지옥에 간다고 협박한다. 이제는 그런 협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천국에 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혹은 천국같은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보은군에서 괴로웠던 서른살의 나에게,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를 보게 해준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동안 수없이 스쳐왔던 길가의 작은 꽃이 그날 비로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 꽃은 내 눈에 띄기 위해 숱한 비바람을 맞으며 자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살면서 이러한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받아왔다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도움이 계속 되기를 바라며, 그 시작은 내 자신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러한 도움을 스캇 펙 박사는 '은총'이라고 불렀다.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 간다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반대의 의미인, 믿음 없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하나님은 영혼을 지옥에 보내기 위해 애쓰시는 분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 간다는 말도,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스캇 펙 박사가 말한 '은총'으로 대신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은총이 있어야 천국에 간다.은총이 있어야 천국처럼 살 수 있다. 스캇 펙의 소설 '저하늘에서도 이땅에서처럼'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아주 알기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기독교적 개념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 그려내었다. 언젠가 내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2005년에 (천국으로) 돌아가신 스캇 펙 박사를 꼭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