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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내 생각

달리기 위해서는 멈춰야 하고



달리기 위해서는 멈춰야 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쉬어야 한다.






*** 중고등부 시절의 기억-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성도 여러분, 주일(일요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주일은 거룩하게 보내야 하므로 상점에서 물건도 가능한 사지 않는게 좋습니다. 주일은 거룩하게 보내야 하므로 교회에서 일하며 섬기세요’


요즘도 그런지 모르지만 제가 어릴 때 다녔던 교회에서는 주일날 거룩하게 보낸다는 ‘주일성수’의 관념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그때 저는 설교시간을 통해, 성경공부시간을 통해 위와 같은 메시지를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일성수(主日聖守)라고 하며, 이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용어도 일요일 대신에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주일이라고 하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일요일이라고 하면 믿음을 숨기는 것이므로 좋지 않은 것처럼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였던가 학생회 총무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주로 하는 일중에 한 달에 한번씩 다과를 준비하는 일이 있었지요. 다과라고 해야 슈퍼마켓에 가서 과자 몇 봉지와 1.5L짜리 음료수 두어 병, 과일 약간 정도를 구입해두는 것이었는데, 주일날 물건을 사는 ‘행위’를 하는 것은 거룩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므로 대부분 토요일 저녁에 미리 구입해두었습니다.  가끔 깜빡하고 토요일에 준비를 못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주일 아침에 일찍 가게에 가서 돈을 주고 다과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그러면 마치 내가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 아니 ‘성스러운 주일에 물건을 사는 사람’이 된 것인가 하는 죄책감이 좀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모임준비를 못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여기고 어쩔수 없이 일요일에 물건을 구입했습니다. 조금 이상한게 있긴 했습니다. 일요일에 물건을 구입하는 게 죄라면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은 죄 짓기를 방조하는게 되는 셈인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는 주일날 아침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해주는 주인아저씨에게 고마움을 느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고민을 겪었습니다. 역시 주일성수를 해야 하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업량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는 두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된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에 일부는 그 근거로 하나님의 이름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럴 듯 하면서도, 좋은 대학을 가게 하기위한 주장의 근거가 약하니까 신의 이름을 끌어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잠시 들긴 했지만, 일단 그냥 넘겼습니다. 반대쪽 한 편에서는 좀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그쪽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알아서 다 챙겨주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중에 일부는 하나님으로 시작된 문장을 대학으로 끝맺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좋은 대학에 가게 도와주신다’라고요.


전자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고, 후자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은 교회일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도 거기에는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안했던 것 같습니다.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굳이 없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신에게 도전한다고 여겼는지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측 주장 사이에 공통점도 있었는데, ‘대학에는 가야한다’ 였습니다.

아무튼 저는 주일날 오전에 가서 대예배에 참석하고, 오후 2시에 있는 학생회 예배를 참석하고,  저녁때는 또래들과 청년부 형들과 축구나 농구같은 운동을 한참 하고, 저녁식사를 하고 오후 7시에 있는 저녁예배까지 참석하고 집에 왔습니다.  그러면 오후 9시쯤 되는데 그때부터 두어시간 집중해서 공부하면서 주일성수라는 규율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고3때까지 그렇게 지냈으니 지금보면 대단한 믿음입니다(웃음). 딴 얘기이지만, 후에 대학에 가고 보니 정말로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친구들도 밤새 시험공부를 하는 것은 대개 시험전날 하루 이틀뿐입니다. 시험이 아닐때는 놀기도 좋아하고 연애도 좋아하고 게임도 좋아하는 그냥 평범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매일 밤샐 각오로 놀지 않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밤샐각오로 공부해라', '누구누구는 어떻게 공부한다든데 그렇게 공부해봐라', '누구누구는 어느 학원, 어느 과외선생에게 배우는데 성적이 좋다는구나. 거기 한번 다녀보자' 이런 말을 자녀들에게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공부벌레같은 친구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몇명 되지 않고, 오히려 성적이 뛰어난 친구들은 시험성적만 빼고 보면 평범합니다. 아, 한가지 다른점이 있긴 하네요. 그 친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다시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와서, 고등학교 2학년때인가 여름방학에 교회에서 경기도 어느 작은 교회로 수련회를 가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방학때 운영되는 보충학습일정과 수련회 일정이 겹친 것입니다. 학교와의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불편하고, 그러자니 수련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벌을 받을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가끔이었겠지만 주일성수를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혼난다는 가르침(?)도 몇 번 들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하필 당시 담임선생님도 학교에서 제일 무섭기로 소문났던 선생님이었지요.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며칠간 불안한 마음에 기도를 빡세게 하고, 용기를 내어 담임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면전에서 거절당하고 매를 맞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이 컸지만, 다행히도 담임선생님은 수련회 참가일정기간동안 학교 보충수업을 면제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이제 친구중에서 고등학교교사로 일하는 친구도 생긴 나이가 되었는데, 그때를 돌이켜보면 당시 담임선생님은 참 난감하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녀석의 요청을 무시하고 학교 나오라 해야 하나, 편의를 봐주어 며칠 결석을 인정해줘야 하나, 그럼 이녀석 때문에 다른 녀석들도 어디어디 간다고 학교 빠지겠다고 하면 어떻게하지…? 그러면 형평성에도 어긋날테고…. 제게는 믿음있는 행동이었는지 몰라도 담임선생님 입장에서는 특혜를 바라는 난감한 행동임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후-일요일은 안식일인가

대학에 가서 전공공부를 하면서부터는 도저히 다니던 교회를 계속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의과대학 학기중에는 거의 매주 월요일마다 시험이 있었는데, 시험성적이 안 좋으면 1년을 재수강(유급)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1년의 시간도 시간이고, 등록금도 수백만원이상 되니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시험있는 월요일 전날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밤새다시피 늦게까지 공부해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학교에서 먼 교회는 계속 다니기가 곤란했지요. 학교 근처로 교회를 옮기면서부터는 ‘주일날 예배를 빼먹지 않는다’는 의미의 주일성수의 개념을 약간 축소시켜서 그럭저럭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가끔 어쩔수 없는 일 외에는 예배를 빼먹지 않았지만, 이게 마치 외줄타기처럼 간당간당하게 유지되는 것 같아 마음 한켠에 불안감은 있었습니다. 불안감보다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구요. 아무튼 그 불안감이 현실을 직면하게 된것은 인턴 때였습니다.


2004년 4월, 의사면허를 받고 인턴을 시작한지 불과 한달이 지난 후에 제가 근무하게 된 곳은 대학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실전경험이 거의 없던 인턴에게 응급실 근무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곳입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집중해서 할 일과 가볍게 할 일을 구분할 수 있고, 비교적 어려운 일도 경험이 쌓이면 쉽게 해결할수 있겠지만, 초보 인턴에게는 그럴 수 있는 여유는 단 한 구석도 없습니다. 그런데 근무하는 곳은 대학병원 내에서도 생사를 넘나드는 일이 제일 많이 이루어지는 응급실입니다. 물론 대학병원은 인턴에게 중요한 결정을 맡길 정도로 책임감이 없지는 않지만, 총을 쏠 권한이 없더라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있는 것 자체로도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요. 응급실은 그런 곳입니다. 경험많은 의사의 눈으로 보면 젊은 인턴의사는 중요한 결정은 별로 내리지 않고 잡일만 하는 의사입니다. 전쟁터에서 경험많은 의사에게 경험없는 초짜인턴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거추장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그때 나오는 분노는 모두 인턴에게 향합니다. 심한 꾸중을 받는 것이 일상입니다. 전문용어로 (인턴을) ‘태운다’, (윗년차에게) ‘탔다’ ‘활활 탔다’고도 합니다. 마음이 새카맣게 될 정도로 활활 탔다(혼났다)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인턴에게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뛰어다니며 지휘관이 지시하는 일을 해야하는 곳이 응급실입니다. 제가 일했던 응급실은 2교대 근무였는데, 12시간을 잔뜩 긴장하고 여기저기서 혼나면서 시간을 보내면 한달같은 12시간이 지나있습니다. 퇴근은 병원 안에 있던 인턴숙소로 합니다. 피곤한 몸을 쓰러지듯이 눕히고 곯아떨어져 잠이 듭니다. 다음날 아침에 깰때는 또 한번 좌절합니다. 너무나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인것처럼 자고 났는데, 이제 한시간쯤 잤으려나 싶은데 눈을 떠보면 12시간 가까이 지나있어 출근시간이 5분 남아있습니다. 그 순간의 좌절감이란….  세수만 겨우하고 머리도 감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겨우 응급실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합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보면 젊은 의사들 몰골이 꽤재재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잘 시간도 없는데 제대로 씻기가 어렵지요. 그러면 또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같은 곳에서 12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생각이고 뭐고 할 여유가 없을 때이지만, 응급실 근무 한달이 지나갈무렵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 나도 우아하게 성경책들고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고 싶다…


 그것은 딜레마였습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안식일이라는 개념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의 출발이었지요. 일요일을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보내는 것이 주일성수이고 안식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죄를 짓는 것- 조금 양보해서 죄짓는 것은 아니더라도 믿음 좋은 것 또한 아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논리라면 응급실 근무하는 의사들은 모두 단체로 죄를 짓고 있는 것 혹은 믿음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주일날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프면 응급실로 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죄인'의 진료를 받게 되는 것이구요. 이 패러다임 속에서 죄인이 되지 않은 방법은 한 가지 존재했습니다. 그 방법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의사가 일요일에 근무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므로,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죄책감 없이 일할 수 있습니다. 원했던 해결책이 아닙니다.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고, 어딘가 이상합니다. 스스로 좋다고 여겼던 믿음은 응급실 근무 한달동안 깨끗이 소멸되었습니다.


***안식의 두번째 의미-쉬어야 한다

안식의 두번째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은 한참 후입니다. 인턴과 레지던트때에는 일년에 여름휴가 일주일이 있습니다. 그나마도 연차가 낮을 때에는 월요일 오전에 회진돌고 나서 휴가가 시작되어 일요일에 복귀하는 스케쥴이라 실질적인 휴가가 5박 6일입니다. 365일중에 360여일을 병원에서 지내는 생활입니다. 레지던트 3,4년차가 되면 조금 낫지만 그래도 일년의 대부분을 출근해야 합니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키우다보니 이건 레지던트 때보다도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레지던트 윗년차가 되면 잠이라도 좀 편하게 자는데, 아기 키우면서는 잠잘 자유까지도 빼앗겼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커서 좀 낫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하룻밤에도 두 세번씩 깨곤 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가만히 있어도 피곤합니다. 그때 분명히 알았습니다. 사람에게는 쉼이 필요하구나! 그러고 나서 보니 안식일에 대한 의미가 달리 보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이 쉬는 날입니다. 사람을 만든 조물주가 더 잘알고 있었겠지요. 쉬지 않고 일하면 금방 고장난다는 것을. 그 속에는 '쉬지 않으면 사람답게 사는게 아니다, 사람처럼 살 수 없다'는 의미도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 안식일이 생겨났겠지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 중에 네번째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메시지를 받을 때에는 그 의미와 배려를 다 헤아리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힘든 광야를 지나는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되었겠지요. 신약으로 와 보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말한 예수의 메시지 속에도 사람을 향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당시도 종교에서 제시한 여러가지 규율로 힘들어했던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고, 저도 그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비슷한 갈등으로 저만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쩌면 이 문제는 생명을 받아 이땅에 태어나 살게된 사람이라면 한 번은 마주칠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규율에 얽혀 사람처럼 살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예수는, 사람답게 살도록 해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죽음 이후의 천국행 티켓을 쥐어주려는 구원 뿐이 아니라 괴로운 현실-아마도 상당부분은 사람들 스스로 만든 현실-로부터 사람을 구원해 내려는 메세지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모두가 정신없이 돈을 벌고, 일하고, 무언가 공부하고 무언가 경쟁력을 갖추기위해 애쓰는 사회입니다.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지 못하면 경쟁에서 뒤쳐진 것 같아 더 불안해하는 사회인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쩔수 없이 무언가에 매달려 있지요. 노인의 경우라면 그것은 젊은이와는 다른 스스로와의 싸움, 즉 외로움이나 젊음에서 멀어지는 것과의 싸움을 하느라 지쳐있을 것입니다. 그 경쟁이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준비이냐, 혹은 오늘 하루를 먹고 살기 위한 생계의 문제이냐, 혹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괴로움이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편히 쉬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정말로 안식이 필요할 때입니다. 달리기 위해서는 멈춰야 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쉬어야 합니다.

*** 안식에 대한 과거의 재해석과 신비로움

안식의 두번째 의미가 점차 선명해지면서, 한동안은 제 지난 과거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안식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일요일에 쉬지 않고 교회에서 하루 종일 보낸 대신, 그 시간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서 푹 쉬었더라면 혹은 다른 즐거운 일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담담하게 ‘후회’라고 짦은 두글자 단어로 표현하지만, 그 단어 속에는 적어도 몇년간의 정신적인 방황이 담겨있습니다. 그런 후회를 한참 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문자적으로 해석된 안식일을 받아들였던 것도 결국은 남이 아닌 나였다는 것이 제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목사님과 성경학교 교사로 일해주셨던 분들이 두번째 의미의 안식까지 이야기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지만, 그 분들은 두번째 의미의 안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제가 지적 한계로 인해 첫번째 의미로만 편협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게 말해준다고 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불가에서는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수 없다(不立文字)’라고 하는게 있다고 하지요. 아무튼 제 책임이 없다고 할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는 첫번째 의미의 안식-일요일을 교회에서 보내야 한다-이 있었기에 두번째 의미의 안식-사람은 오랜 긴장상태로 살수 없다. 쉬어야 한다-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구요. 달리 표현하면 첫번째 의미는 형식이고 두번째 의미는 내용입니다. 분석심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표현을 빌자면 형식은 '페르조나(Persona, 사회적 형식)을 의미합니다. 페르조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페르조나를 없애야 되는게 아니라 페르조나로부터 나를 구분해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더 생각이 변해갑니다. 두번째 의미의 안식은 주일날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즉 첫번째 의미의 안식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캇 펙 박사의 말 ‘신비로움을 해결할수록 더 많은 신비로움과 조우하게 되며,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매우 편안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말의 의미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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