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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내 생각

내 인생의 구약시대

내 인생의 구약시대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어떤 곡을 듣고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따로 클래식 동호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고 페드넷(소아과의사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클래식음악을 주로 듣는 나에게도 그런 곡이 몇 곡 있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의 피아노소나타 21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같은 곡들이다. 이런 곡-들으면서 인생의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마치 인생을 조망하는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하게 해주는 곡이 몇 곡이 되는가에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다. 듣다보면 한 곡 두 곡 천천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곡이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음악에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나는 32곡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중에서 유명한 '비창', '월광', '발트슈타인', '열정' 처럼 표제가 붙은 몇곡만을 겨우 들어봤을 뿐이지만 그런 이야기에 어느정도 공감이 된다. 나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은 음악들이 몇 곡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조망해보는 느낌. 그 느낌은 참 좋다.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마치 하늘 높이 날아가는 독수리라도 된 듯한 느낌으로,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웅장하고 때로는 애절한 느낌을 주는 음악을 듣다보면 내가 사로잡혀 있던 감정들이 어떤 감정들인가를 관찰하게 된다. 감정을 더 큰 시야에서 조망하는 느낌이랄까. 그 느낌은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이다. 내가 경험했던 감정인 동시에 타인(작곡가를 비롯한 수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이 똑같이 경험했던 느낌이기 때문이다.



<Bach의 Goldberg variation(골드베르크변주곡), Glenn Gould. Goldberg variation은 정말로 신비스러운 곡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언젠가부터 성경도 그렇게 읽혀지는 것 같다.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자서전을  몇 권 씩 쓰고도 남을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아무 걱정없이 즐겁게 놀았던 기억과 무서운 어른에게서 혼났던 기억, 첫사랑의 기억, 학창시절의 기억 등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내 아버지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초등교육 6년만 겨우 받았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도 있을 터인데 아무튼 각자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진료실에서 가끔 노인분들을 진찰하면서 내가 '언제부터 아프셨어요?'하고 물으면, 적지 않은 노인분들이 '한 20년쯤 되었지...아니 30년쯤 되었나'라고 시작하시는 것을 보면, 누구나 각자의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은 것 같다. 아무튼 나 역시 내가 살아온,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인생이 있는데, 이걸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창세기에서 시작된 성경의 진행과 비슷한 부분이 조금씩 내 눈에 들어온다.


1979년은 아마도 내 인생의 창세기(Genesis), 그중에서도 1장 마지막부분-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그 때-일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세상은 분명히 존재했겠지만,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전혀 알수 없었을 세상이다. 누가 태초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1979년 이전의 세상이 존재했다는 것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1979년 이전부터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믿었기에 그나마 지금의 내가 알고 있지만, 내 선조들도 그 윗대로 올라가서 최초에는 누가 그 사실을 말해주었을지 알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때문에 성경에서도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창1:1)'로,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요1:1)'로 알듯 모를듯한, 어떻게 보면 믿을만 하고 어떻게 보면 의심스럽기도 한 선언문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일부 무신론적 진화론자들과 (전혀 과학자스럽지 않은) 일부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에서 과학의 흔적을 찾으려 열심히 애를 쓰지만, 성경은 선언하듯이 짧게 말할 뿐이다.



<11개월때, 의식이 생기기 전(내 기억속에 없는)의 나>


1,2살때였던 1980년대 초반에는 마치 에덴동산에 있던 창세기 2장에 해당될 것 같다. 벌거벗고 다녀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을 뿐더러 벌거벗은 것을 스스로 알지도 못했을 때였으니 에덴동산에 있었던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선악을 알게되는 창세기 3장이후의 이야기는 아마도 1982년(만 3세) ~1985년(6세)정도쯤 될 것 같다. 벌거벗으면 부끄럽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가인과 아벨만큼은 아니었는지 몰라도 나 역시 한 집에 살던 내 형제들과 갈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희미하기는 하지만 누나와 형과 다퉜던 기억이 있기는 하며, 무엇보다 지금 그 나이를 살고 있는 우리집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나 역시 어렸을 때 수많은 형제간의 갈등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냈을 것은 누가봐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신학에서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했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 3살무렵의 나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을 것 같다. 문제는 그 '의식'이라는 것이 태어날때 본성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즉 배고프면 밥달라 울고, 졸리면 짜증부리다 그냥 쓰러져 자고, 맘에 안드는게 있으면 떼를 써서 울고, 배변욕구가 느껴지면 당장 배변을 해야했을 것이기에, 그것을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하자면 어른들의 눈에는 '타락' 혹은 '죄'라고 느껴질 법도 했을 것이다. 무리한 표현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를테면 집을 깨끗이 치워놨는데 청소가 끝나자마자 3살짜리 아이가 거실 한가운데에 볼일을 봐버린다면, 그리고 나서 기분좋다고 씩 웃고 있으면 어른의 입장에서 '죄'로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며, 설령 죄는 아니더라도 화가 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아이입장에서는 '의식'을 갖는 것인데도 그 자체만으로 '타락'이라고도 부를 성질이 약간이라도 있기는 한 셈이다. 


창세기 이후의 모세오경, 즉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학생시절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시간표에서 찾자면 아마도 1986년(초1)~1997년(고3)쯤 될 것이다. 이 시간동안 나는 수많은 예절과 생활규칙, 세상을 살아갈 지식을 배웠다. 그 중에 특히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10여가지 꼽아보라고 하면 그것은 아마도 십계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배웠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지식들은-사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일텐데- 대부분 듣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잊어버렸다. 레위기을 읽고 난 후 읽은 기억조차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글자로만 배운 지식이 실제로 내 것이 되려면 살아가면서 경험에 덧입혀져야 되는 법이며, 때로는 전혀 알지 못한 지식중에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도 있어서, 경험 이후에 지식을 듣게 될 때엔 '아, 이게 바로 그 얘기였구나'하고 무릎을 탁 칠만한 깨달음을 얻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아무튼 지식을 배우는 학생시절은 모세오경, 특히 온갖 규율로 가득한 레위기와 신명기에 해당한다고도 할수 있겠다. 모세오경에서는 지식을 배우지만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긴긴 시간을 실제로 살아가면서 그 지식의 깊은 의미를 몸소 체험하며 지혜로 바꾸어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된다. 사람도 학생때 배운 지식을 사회에 나와 경험하면서 서서히 지혜로 바꾸는 작업을 하면서 살게 된다. 


애굽을 나온 이후의 삶은 광야의 삶이다. 말이 좋아 광야이지 사실 사막 같은 곳도 많았을 것이다. 햇빛은 강렬한데 쉴곳도 마실물도 거의 없는 그런 곳에서 어찌 방황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40여년간 광야에서 같은데를 돌고돌면서 길을 잃고 방황했다고 성경은 기술하는데, 사람의 인생에서도 사춘기를 전후해 짧든 길든 방황하는 시기가 있다. 우스갯소리중에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사춘기때 적당한 방황을 하지 않으면 더 나이들어서 더 크게 방황(X랄)을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적당한 방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모두 필요했을 것이며, 사람의 인생에서도 자녀의 적당한 방황은 가족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먹을것 입을것 불평하고 지도자 모세에게 자신들의 불만거리를 투사하였다고 이후 수천년동안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비판을 받아왔을텐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사람이 인생에서 방황하는 경험을 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스라엘백성이 받은 비판은 좀 과하다고 할수도 있겠다.




<1998년,이런저런 고민이 많았을 때 광남이와 갔던 강촌 여행> 



이후에는 나의 인생을 살게 된다. 약간의 예외는 있겠으나 현대 한국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의무교육을 받는 것까지는 비슷하고 이후에 학업을 더하기 위해 대학에 갈지,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지 혹은 자기 사업을 할지 혹은 그 외의 길을 갈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학생 이후의 삶은 그 삶의 양태가 어떤 모습이든간에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된다. 성경에서도 모세오경 이후 펼쳐지는 역사서(여호수아부터 열왕기, 역대기)에 수많은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내 개인적인 경험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에피스도도 몇가지는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룻기는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이야기를 짧게 그린 책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마치 할아버지의 연애담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룻과 보아스는 오벳을 낳게 되는데 오벳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윤종신의 노래중에 '아버지의 사랑처럼'이라는 노래는 '언제인가 들어보았지 아버지의 사랑얘기를, 지금 우리와는 다른 한 총각 얘기를~'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성경을 읽는 독자는(어쩌면 나혼자만) 보통 자신을 다윗의 입장에 놓고 읽기 쉬운데, 룻기를 낭만적으로 보자면 할아버지의 사랑이야기가 될수도 있고, 설령 연애의 관점을 빼고 담담하게 룻기를 읽는다 하더라도 나보다 100년전 할아버지가 살았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첫사랑을 겪을때쯤 윤종신이라는 가수를 좋아하게 되고 그의 노래 중에 '아버지의 사랑처럼'을 들으며 그당시 연애의 감정을 즐겼듯이 말이다. 신기한 것은, 윤종신의 '아버지의 사랑처럼'이라는 노래를 사춘기때 들을 때에는 남녀간의 연애의 감정의 눈높이에서 노래가 들려왔는데, 아버지가 된 지금은 말 그대로 '아버지의 사랑'의 눈높이에서 노래를 듣게 된다. 아마도 룻기도 연애의 관점에 읽을 때와 아버지의 사랑의 관점에서 읽을 때 두가지 관점의 독자 모두에게 감동을 줄 것 같다.


구약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편이었다. 구약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시편을, 내가 보는 내 인생의 구약시대의 중간쯤, 즉 스무살쯤 읽었다. 대학교 1학년때였는데 여러가지 문제로 고민하던 불안정한 스무살의 마음은 시편을 읽으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불안정했던 마음이 시편을 읽고나서 바로 안정을 찾았다고 하면 그것도 좀 이상한(무언가 솔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시편을 읽으면서 '아! 나와 비슷하게 불안하고 답답한 현실을 살았던 사람이 또 있었구나'라고 느꼈던 동질감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살다가 힘들 때 옆에 내 얘기를 묵묵히, 섣부른 가치판단이나 가벼운 조언없이 그냥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훨씬 낫지 않은가. 그당시 시편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실제로도 시편같은 역할을 해준 사람도 있었다. 대학교 6년 선배였던 현규 형이 내게는 그런 존재였다. 형도 그 자체로 불안한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내 고민을 비판없이 그대로 들어주었다는 점에서, 그것도 시편이 짧지 않은 것처럼 짧지 않았던 기간동안 같이 시간을 보냈다는 점에서 내게는 시편같은 형제였다. 


구약을 읽으면서 가장 큰 어려움도 있었다. 하나님이 너무 무섭다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듣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뜻에 어긋나면 광야에서 수십년간 고생을 시키기도 하고 수백 수천명씩 죽이기도 하는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들었는데 유독 이스라엘 민족만 편파적으로 보호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나마 아끼신다는 이스라엘 민족도 그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기는 했으니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아니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이 정상이다. 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될지, 아니 정말 믿어도 되는 존재인지 회의가 들 뿐아니라, 이쯤되면 하나님이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지, 사람이 하나님을 이해해야 하는지에도 혼란이 온다. 간혹 구약에서 그려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여러번 들었는데, 내게도 그 부분이 큰 걸림돌이었다.


아마도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섭게 느껴졌던 것은, 실제 삶에서 세상이 두렵게 느껴졌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이야기하고 기쁨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보면 행복보다는 긴장이,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특히 사회 초년병시절엔 훨씬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삶에 대해 행복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구약의 하나님을 읽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던 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는 어느정도 그 모순에서 벗어나 역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실제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벌을 내리고 때로는 죽음으로 죄값을 물은 것에 대해서 나는 다 알수 없다만 내가 그 모순을 역설로 이해하게 된 단초는, 사춘기 이후 내가 내 아버지에 대해서 느꼈던 감정 때문이다. 아마도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에 대해 느꼈을 감정과 내가 사춘기때 아버지에게 느꼈던 감정은 비슷한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이끌어내어 광야로 가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게끔 이끌었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하나님은 그 길을 이끌었다. 내 아버지-매우 엄하고 무섭게 느껴지던 분이셨는데-도 나를 양육하고 교육하기위해 뒷바라지를 해주셨고 학교로 사회로 이끄는 역할을 하셨다. 물론 나도 그 과정이 힘들었다.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었고, 연애도 하고 싶었고, 즐거운 일들만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원하셨던 것은 잘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난 후에야, 내 어릴적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니 아버지의 모습은 무섭지도 그리 엄하지도 않은 아버지셨다. 아마 지금의 내 딸들도-특히 마음이 여린 둘째 진하는 아마도 더욱- 내 말 한마디에서 무서움을 느끼기도, 엄한 모습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나는 내 딸들이 바른 사람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게끔 이따금 불편한 말을 하기도 하고 안전이 급할때는 얼른 팔을 잡아당겨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기도 하는데, 딸아이 입장에서는 그게 무서움으로 느껴지기도 완고함으로 느끼지기도 한다는 것을, 내가 아버지가 되고나니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후 구약의 긴긴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구약에서 비춰지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도 정확한 표현일 것인데, 다만 내 개인적인 생각에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시대로 넘어와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어린아이가 어찌 아버지의 공의와 사랑을 깊이있게 이해할수 있을까. 이해한다면 말한다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일 것이다. 모세오경처럼 말로 전하는 지식으로야 가르쳐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의미를 알려면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봐야 비로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아버지가 되면서부터 비로소 구약의 하나님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내 인생의 구약은 지나간 것 같다. 이제 은혜의 시대 신약이 다가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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