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종교 & 철학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현각 스님, 열림원

굳이 분류하자면 불교서적이다. 그것도 카톨릭에서 불교로 개종한 사람의 책이다.


참 오래 걸렸다. 초등학교 때 일요일 9시 TV만화영화를 뒤로 하고 가까운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한 이후로, 고등학생 때 학생회 활동이 재미있어서(사실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아서) 매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대학생 때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안마시겠다'고 선언한 이후로, 내가 불교관련서적을 거부감없이 접하기까지 말이다. 아마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나를 보면서 이해를 못하겠다거나 알수없는 두려움을 느낀다거나 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나를 알던 사람들은 지금의 내가 불교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전에 나에게 교회를 다니지 말고 차라리 불교를 믿으라고 했던 목사님도 있었으니, 그 분은 나의 미래를 본 것이었을까. 사실 세상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이 나를 향한 남들의 관심은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서 아무렇지 않아지는 것들이지만, 내가 그동안 기독교에 충성해서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 것처럼 해왔던 게 있어서 스스로를 뻘줌하게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술을 안마시겠다고 했던 다짐은 벌써 수년전에 스스로의 외로움때문에 깨뜨려버리고, 지금은 맥주 한두캔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되어있는데, 지금의 지나친 확신은 미래의 자신에게 올무가 되어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정치인들의 남을 향한 비판처럼 말이다.


이 책은 현각스님의 자전적 에세이다. 전통적인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의 보편적인 시각으로는)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오다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자신의 성장배경을 뒤로 하고 한국에 와서 스님이 된 사람의 책이다. 그를 현재 '스님'이라고 부르지만 과거에는 '카톨릭 교인', '예일대 학생', '하버드 대학원생' 등으로 불렀을 것이다. 태생으로 보면 '미국인'인데, 사는 곳은 한국이다. 그를 누구라고 해야 할까.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일부 기독교에서는 타종교를 배척하는 성향이 강하다.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자처하는 분파일 수록 배타적이다. 보수적이기에 현대신학의 새로운 바람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고 배척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지켜온 자신들의 신념은 더욱 견고하게 붙잡으려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 대한, 타국(특히 경제발전이 늦은 나라들)에 대한 선교에는 열정적일 정도로 자신들의 신념은 바꾸지 않으려하는 사람들이, 타인들의 신념을 바꾸는 데에는 가장 적극적이다. 그러한 역설적인 상황은 내면의 갈등을 일으키거나, 혹은 정신의 분리를 일으킨다.


현각스님은 미션스쿨을 다니던 학생때에, 성당 수녀님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들이다.


"수녀님, 예수님이 사랑이라면 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는 건가요?" 순간 수녀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p.46)


"회교도와 인도, 아프리카, 중국 등에 사는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까? 지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들에게도 그들의 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가 믿는 신을 안 믿는다고 해서 모두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까?" 수녀님은 좀 당혹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내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이란 "오직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 뿐이었다. (p.56)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현각스님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다. 기독교를 처음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할때 내 속에서 올라왔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나보다 먼저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대답은 무엇인지, 또 대답을 얻기까지는 책만 읽거나 토론만 하기보다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도 어느정도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어린아이 혹은 초심자의 순수한 질문에 '우리가 가진 것(믿음)이 없는 이들은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답을 하거나, 나쁜 질문이라고 단죄하고 '믿음'만 강조하는 것은, 사실 그들 자신들 조차도 믿지 못한다는 반증인 듯 싶다. '모른다', '알 수 없다'고 대답할 용기가 없으니 믿음이 부족한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쩌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지식, 돈, 건강 그 무엇이든 자신의 소유인줄 알았던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초월적 존재인 신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이 '인생은 겸손을 배우는 긴 수업이다 Life is a long lesson in humility'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인류가 20세기에 도달해 물리학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발표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발표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휴가를 즐기고 일을 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신학에서도 아마 과거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나, 이제는 '나 외에 다른 신'도 있을 수 있는, 상대적인 종교관의 세계로 바뀌어갈지도 모르겠다. 종교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식사를 하고, 일을 하고, 휴식을 즐긴다. 다만 바뀔때의 개인적인 시대적인 진통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 초월적인 존재인 신은, 나같은 개인이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은-무신론자도 포함해서- 무언가를 열렬히 따르기 때문이다. 종교가 아니라면 신념을, 신념도 아니라면 돈을, 돈이 아니라면 사람을, 혹은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하는' 신을 믿는 이들을 가만히 보면, 특정 사람이나 특정 물건을 마치 신을 섬기듯이 숭상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뿐 아니라, 이 책에서도 현각스님이 좋아하고 따르던 숭상 큰스님이나 법수스님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마치 신적인 존재를 묘사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람은 내면에 신적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리라. 융이 사람 내면의 그 이미지를 가리켜 '자기 self'라고 불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스님은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려고 하버드 대학원에 입학한다. 이후 한국에서 온 생불(生佛) 숭산스님의 강의를 듣게 되고 불교에 입문하게 된다. 아마도 스님은, 가장 현대화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사회적 체면(persona)를 가지고 살면서, 역설적으로도 그 곳에서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서 온 어느 스님에게서 진리를 발견했던 것 같다. 과거 7-80년대의 한국은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한국의 교회역시 미국의 기독교를 받아들여 (양적인) 고도성장을 이루던 동시간에, 미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살던 사람은 정신적인 자유를 찾아 한국의 불교를 배우러 왔다는 것도 참 역설적이다.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관계없이, 미국에서 태어났든 한국에서 태어났든지에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적어도 나는 겪었던) 고민을 현각스님도 겪었다.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그 무언가를 찾아 방황하고 고민하는 그 과정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풀어낸 이 책은, 바로 그 점 때문에 같은 고민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