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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영화

[영화] 바그다드 카페, 퍼시 애들런 감독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바그다드 카페. 십년은 지났을 것이다. 언젠가 PC로 이 영화를 본 것이. 그 당시 남은 기억은, 몽환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OST의 멜로디 'I~~~~~ am call~~~~~ing you'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 다 쓰러져가는 먼지쌓인 카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오늘 갑자기 아무 계획 없이 영화를 보고 싶어졌고, 그 영화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로 고르고 싶어졌으며, 몇번의 인터넷 검색후에 최근에 재개봉했다는 영화 '바그다드 카페'로 정했다. 왜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영화라는 것을 보고 싶어졌고, 또 무슨 이유로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해 분석심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무의식이 시켰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무의식이라는 말 자체가 알지 못하는(의식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이니, 그럴 듯한 대답이다. 써놓고 보니 다소 종교적인 대답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가까이에서 '바그다드 카페'를 상영하는 곳으로는 인천 주안에 있는 '영화공간 주안'이 있었다.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처음 와 보았다. 화요일 오후에 10여명 남짓한 관객들을 모아놓고 '바그다드 카페'를 상영하는 단촐한 영화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점이겠지만, 나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기에 내 입장에서는 영화보기에 최적화된 상영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좋은 책, 좋은 영화, 좋은 음악의 정의를 내린다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시간이 지난후에 다시 접했을 때에도 새로운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내가 느꼈던 좋은 책, 영화, 음악은 한결같이 여러번 접하다보면 새로운 감동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도 그러했다. 처음보았을 때의 기억은 'I'm calling you'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카페' 밖에 없었지만,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본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영화 곳곳에서 마흔살이 가까워진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남편과 헤어진 독일인 '야스민', 그녀가 경험했을 상실감을 언뜻 이해할 것 같았다. 성격차이인지, 돈문제인지, 이성문제인지 아니면 무엇때문인지는 영화에서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그녀의 남편과 헤어진다. 감독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카메라 앵글을 비스듬하게 잡아서 촬영한 그 남자말이다. 아마도 그녀는 결혼할 때는 화목한 가정과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나, 오랜 갈등을 겪으면서 그녀가 만들었던 환상은 처절히 깨졌을 것이고, 결국 남편과 헤어지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도 모르는 무기력감만 가지고, 먼지쌓인 '바그다드 카페'에 묵게 된다.

 

바그다드 카페의 주인 '브렌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한결같이 그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커피를 파는 카페의 커피머신은 고장났으며, 테이블에는 손님이 오지 않아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다. 남편은 무능해서 모든 일을 그녀 자신이 직접 챙겨야 하며, 그나마 그 남편도 브렌다의 잔소리에 차를 몰고 어디론가 도망가버린다. 바흐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젋은 아들은 어디서 아기를 낳아 왔는데도, 일을 하는 대신 피아노가 도피처라도 되는 듯 피아노 연습에만 매달려 있다. 모든게 엉망이다. 살다보면 주위의 모든게 엉망이 된 것 같은 느낌, 혹은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엉망이 될 것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이 내 마음을 브렌다에게도 공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 두여자가 만났다. 남편과 헤어진 '야스민'은 황량한 사막길을 걸어 바그다드 카페에 도착했을 때 땀을 흘리고 있었고, 역시 남편이 떠나간, 생활고에 시달리는 '브렌다'는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야스민과 브렌다의 만남, 땀과 눈물의 만남, 아마도 그 장면에서 감독은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암시했을지도 모르겠다.

 

PC를 통해 이 영화를 처음 봤었을 20대 후반의 나는 애절하다고 해야할지 몽환적이라고 해야할지 모르는 'I~~~ am call~~~ing you'의 멜로디만 기억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 지나 이제 마흔-유교문화권에서 '불혹'이라고 부르는 그 나이-가 가까워진 지금의 나에게는 야스민이 겪었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삶의 회한과 무기력함을 일부나마 느끼고 있으며, 브렌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무겁게 짊어진 삶의 무게 또한 일부 느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십여년을 더 살아오면서 나는 야스민과 브렌다가 겪었을 삶의 애환의 일부나마 겪은 것 같다. 그러기에 그들이 비록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일부라도 투사시켜, 혹은 나와 같이 사는 내 아내의 마음을 그녀들에게 투사시켜서 그들에게 공감을 느꼈던 것이리라.

 

야스민이 브렌다의 지저분한 사무실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삶에 마법이 펼쳐진다. 야스민이 마술을 배워서 카페에서 마술공연을 시작하고, 그러면서 초라했던 카페는 북적북적해지며 그 곳 사람들도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마법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아마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도- 내 삶에서도 어느 순간 마법이 일어나기를 바라 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희망이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그러면서 야스민도 과거에 자신을 부르던 호칭 'OOOOOO부인'대신에 '야스민'이라고 자신을 당당하게 소개한다.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OST 'I'm calling you'를 기억하는 것 같다. 맞다. 이 영화에서는 황량한 사막에서 황량함 그 자체가 피부로 느껴질 때와, 일이 잘 풀리다가도 좌절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를테면 야스민의 영주권이 없다고, 보안관이 단속하는 장면같은-에는 'I'm calling you'가 흘러 나온다. 황량함과 좌절감, 이 두 단어를 몽환과 애절이라고 대치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마다 'I'm calling you'가 흘러나온다. 그것을 제 3자로서 감상하는 내 입장에서는 듣기 좋았다. 이 영화의 주된 OST는 'I'm calling you'이다.

 

https://youtu.be/oCLpLWcX2cg BAGDAD CAFE, I'm calling you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내 기분을 더 좋게 만들었던 것은 브렌다의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 곡,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평균율'이었다. 이 곡은 영화속에서도 그러하지만, 내 실제의 삶 속에서도 내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곡이다. '평균율'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가 음악학적으로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흐의 음악, 특히 '평균율 Well-tempered clavier'은 내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 같다. 음악 멜로디가 삶의 중심을 잡아준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아마도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바흐 예찬론자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바흐의 음악 한 곡을 듣고 나면, 이를테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샤콘느 Chaconne'같은 곡이나 '토카타와 푸가 D단조',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 같은 곡을 듣고 나면, 웬지 이제부터는 삶을 정신차려서 똑바로 살아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피곤에 지쳐있던 순간에는 마치 피로회복음료 '박카스'처럼 피곤을 풀어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일부 클래식 매니아, 아니 바흐 매니아들은 박카스에 빗대어 '바흐Bach카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https://youtu.be/22yLbGU3obA Jonh Lewis 가 연주하는 J.S.Bach의 Well Tempered Clavier 1권.

 

 

 

아무튼 그런 바흐의 평균율이 이 곡에서 여러번 흘러 나온다. 아마도 먼지쌓이고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한 바그다드 카페에서, 각자의 혼란스러운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바흐의 피아노곡이라도 된다는 듯이, 브렌다의 아들은 모든 혼란에는 귀를 막으면서도 바흐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데에만 집중한다. 영화 후반이었던가, 결국 그는 카페에 사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그의 음악에 대한 갈망을 '야스민'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흐도 독일 사람이고 영화속 야스민도 독일 사람이다).

 

아마도 십년 이십년이 더 지나서 내가 50, 60이 되어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또 다른 느낌일 것이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마도 한때 헐리우드에서 그림을 그렸다가 나름의 사정을 가지고 바그다드 카페에 정착하게 된 화가 '콕스'의 시선에서, 혹은 야스민과 헤어진 독일인 남편(스태들바우어)의 시선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른 여덟인 지금의 나는, 살면서 예상치 못했을 어려움을 접한 두명의 여자 '야스민'과 '브렌다'에게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삶의 애환을 비추어본다. 그리고 영화에서 여러번 반복되는 바흐의 평균율을 들으며 힘들더라도 다시금 내 삶의 중심을 잡으려 애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