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영화

[영화] 산딸기, 1957, Ingmar Bergman



첫 개인분석시간에 분석가선생님은 내게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을 소개해주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소개를 해주었을 뿐인데, 나는 마치 그 감독의 영화를 봐야 될것 같은 당위성을 느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오늘 소개받은 감독의 영화를 감상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선택한 영화는 '산딸기'이다. 일요일인 오늘 새벽 의미있는 꿈이 나를 깨워서 시계를 보니 5시이다. 밖은 어두컴컴하고 아침산책을 나가기에는 아직 어둡다. 다시 잠들려고 누우니 잠이 올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미리 받아둔 영화 '산딸기'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본 영화중에 나보다 먼저 태어난 영화로는 아마 이 영화가 처음인 것 같다. 1957년작이니 말이다. 그와 동시에 하루중 가장 이른 시간에 본 영화로도 기록될 것 같이다. 새벽 5시 20분경부터 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람마다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이 다르므로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영화일 수도 있겠다. 잠이 덜깬 상태에서 보기 시작한 이 흑백영화 역시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태껏 살면서 보니 첫인상이 강렬했던 일이 곧 허무감을 주거나 첫인상이 아주 매력적이던 사람이 사실 알고보니 빈곤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고, 반대로 평범해보이는 소소한 일이 언젠가부터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주기도 하며 가벼운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인생의 희노애락을 통해 깊고 넓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지 5분만에, 뭐야 이거 하며 꺼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한 바구니 떠내어올리면 더 맑은 물이 올라오는 샘처럼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의미가 많은 영화가 되어주었다.


50년간 의사이자 학자로 생활하며 많은 외부인들의 존경을 받아온 이삭 보리 박사는 자신의 박사학위취득 5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날 새벽에 이상한 꿈을 꾼다. 꿈속의 거리에는 바늘없는 시계가 보이더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그에게 손을 대니 그가 쓰러져 죽고, 지나가는 마차에서 떨어진 관에서 나온 죽은 자신이 살아있는 꿈자아의 팔을 잡아당기는 꿈이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꿈이라 느껴져서인지 예정된 비행기 대신에 자동차를 타고 기념식장에 가기로 한다. 하나뿐인 아들과 불화를 겪고 있는 며느리 마리안과 출발하는데 가는 길에 젊은 청춘남녀 3명을 태워 같이 여행하게 되며, 우연한 교통사고를 통해 굉장히 병리적인 부부관계를 살고 있는 어느 부부와 잠시 만나기도 한다.


영화속 이삭 보리박사는 합리주의의 세계에서 평생을 살았던 것 같다. 그는 밖으로는 여러 사람의 생명을 살린 의사로, 학계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존경받는 학자로 살았으나, 가정에서는 그러지 못하여 아내와는 평생 불화속에서 살았다. 하나있는 아들은 그런 부모의 밑에서 자라며 상처를 많이 받아서인지,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매일 보고 자라서인지 아버지와 같이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하면서도 감정은 메마른 차가운 사람이 된다. 이 집안에서 여성성은 발붙이지 못한다. 따뜻한 여성성 없이 차가운 남성성만이 존재하는 이 집안에서, 따뜻한 여성성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며느리 마리안인 것 같다. 그녀는 차가운 남편과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따뜻한 가정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그의 남편은 자신이 구축한 합리주의의 세계-이렇게 불합리한 세계에서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나와 똑같은 불합리(사실은 불행)를 경험하게 해서는 안돼라는-의 벽 안에서 따뜻한 여성성을 거부한다. 마치 차가운 눈밭위에 따뜻한 차 한잔을 놓으면 곧 식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마리안은 남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임신한 아기를 어떻게 해서는 낳아서 키우고 싶어한다.


그 쯤이던가 노년의 이삭 보리박사는 자신이 겉으로는 화려한 인생을 산 듯 하지만, 사실은 산 송장이라며 살아도 산게 아니라고 고백한다. 아마도 기념식날 새벽에 꾼 꿈은 보리박사 자신이 학문의 세계 직업의 세계에서는 열심히 살았으나, 진정한 자기 자신 즉 가정에서나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인간 이삭 보리는 그동안 살아도 산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 그 꿈 덕분인지 혹은 아들부부의 불화를 옆에서 보면서 자신이 느끼게 된 때문인지는 모르나, 박사는 자신만 모르던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여행길에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에 잠시 들리며 그곳에서 어린시절에 대한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경험을 하게 된다. 어릴때 그는 착하고 성실한 소년이었다. 자신과 사귀던 여자 '사라'를, 바람둥이지만 매력적이었던 동생 지그프리드에게 빼앗기게 되며 결국 사라와 지그프리드는 결혼하게 된다. 이삭은 그 후에 부인을 만나 결혼하고 의사와 학자의 세계에서 평생을 살게 된 것이다.


유년시절의 그는 아마도 성실히 살았을 것이다. 그의 연인이었던 사라의 고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사라는 결국 가슴이 느끼는대로 바람둥이 지그프리드를 만나게 되긴 하지만, 머리로는 이삭이 훌륭한 남자라고 인정한다. 이삭 보리는 그 이후에 중년, 노년을 거치면서도 유년시절과 마찬가지로 성실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어디서 엇갈리기 시작했을지 모르는 자신의 감정은 뒤로한채, 자신의 외적인 사회(페르조나)인 의사와 학자 영역에서만 성실했을 것이다. 자신 내면의 감정과 가족은 때때로 그의 성실함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느껴졌을 것이며, 그럴수록 그는 아마도 자신의 감정과 가족을 무시하고 자신의 직업에만 더욱 성실했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혹시 그를 구원에 닿게 할 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내면의 감정은 철저히 무시당해왔을 것이다. 그런 그의 아들(에발드)이 아버지를 싫어하게 되면서도 그런 아버지를 닮아 비슷하게 살게 된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결과인지도 모른다.


여행중에 만난 십대 후반의 세 청년(남자 둘 여자 하나)은 인생의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이삭 보리 박사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전해주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젊은 여자는 박사의 첫사랑(?) 사라와 이름이 같다. 박사는 아마도 젊은 여자에게서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상상해보았을 것이다. 남자 둘, 즉 엔지니어가 되고자 하는 철저한 무신론자 빅과, 목사가 되고자 하는 철저한 유신론자 안데스와의 동행 속에서는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경험을 반추했을 것이다. 어쩌면 박사는 인생의 어느 시간은 무신론자처럼 어느 시간은 유신론자처럼 살아왔을지도 모르며, 또 인생의 어느시점에서는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음을 인식했을 것 같다. 그 초월적 존재-인간이 신이라고 부르는-에 대해서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닌, 사람의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며 이성으로는 알수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며, 하루하루 초월적 존재의 자취를 느끼며 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무신론자인 빅과 유신론자인 안데스의 논쟁에 어느 편 손도 들어주지 않고 묵묵히 중립을 유지한다. 이것이 저들을 돕는 방법이라면서. 아마도 박사는, 진리는 남들의 논리를 무력화시키거나 혹은 자신의 논리안에서 자아도취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닌, 삶을 치열하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 안에서 답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스스로 답을 얻어야 될 것이므로, 아직 답을 찾지 못했으면서 타인에게는 자신의 답을 강요하는 젊은이들의 주장을 묵묵히 듣기만 한게 아니었을까.


영화 후반에 경험한 환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 첫사랑(?) 사라는, 더이상 산딸기가 없다고 한다. 산딸기는 영화 초반에서 유년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서 나타나는데, 영화 후반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상징이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박사는 유년시절에 고착된 어떤 기억을 떨쳐버리고(산딸기도 더이상 없으니), 이제 자신의 현실-유년의 기억이나 사회적 역할이 만들어주는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 인생-속으로 들어가 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50주년 기념식은 성대하게 치뤄진다. 가정에서 따뜻하고 자상한 역할은 거의 하지 못하고 사회적 역할에만 성실히 임해온 박사의 기념식은 성대하게 치뤄지지만, 그 성대함은 오히려 그가 평생 무시해온-어쩌면 스스로가 피해자인- 자신의 감정과 가족의 보잘것 없음을 더 강조하는 역할을 해준다. 영화 내내 따뜻한 여성성이 소실된 차가운 남성성의 세계를 살아온 박사의 삶은 성대한 기념식으로 대변되지만, 감독은 그의 초라한 가정사도 관객에게 보여주었기에, 성대한 기념식은 어딘가 허전하다.


그럼에도 영화의 끝은 희망적이다. 평생 자신을 박사라고 부르며 집안일을 도와준 가정부-사실상 아내이자 비서 역할을 해준-에게, 이제 박사를 호칭을 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제안한다. 박사는 사회적 역할 대신 인간으로서의 이삭 보리로 불리고 싶은 것이다. 평생을 박사라는 타이틀로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가리고 있었던 그는, 다소 늦기는 했지만 자신의 가면을 벗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