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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문학

침묵, 엔도 슈사쿠, 두번째 독후감

침묵, 엔도 슈사쿠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서른 살 무렵이던 2009년즈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읽었으니 꼭 7년여만에 다시 읽은 셈이 된다. 7년전 독후감(http://bocki.tistory.com/32)에 썼듯이, 큰 줄거리는 간단하다. 포르투갈의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많은 존경을 받던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후 배교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의 제자인 '로드리고'신부는 일본선교를 위해 그리고 그가 존경하던 페레이라 신부를 찾기위해 일본에 가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2009년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일본을 향해 출발한 로드리고 신부의 관점에서 읽혔던 것 같다. 그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안에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었다.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테두리 밖에서는 일이 해결되지 않을 뿐더러 해결될 수도 없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사랑이신 분으로, 내게 좋은 일만 일어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내지는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다 들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라고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굴절해서 받아들인 '신념'이었다. 성경을 보는 내 눈이 굴절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에는 참으로 기나긴 세월이 필요한 것 같다. 


2016년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이 소설을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의 관점으로 읽어버렸다. 7년의 시간이 나라는 사람의 생각을 전혀 다르게 바꾸어 버린 셈이다. '선 곳이 다르면 풍경이 바뀐다'라고 했던가. 지난 7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나는, '믿음', '신앙'이라는 기독교 용어의 의미를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스무살의 나는 '기독교인은 술마시면 안된다'는 교육을 교회에서 받았었는데, 그 덕분에 대학교 6년과 대학병원생활 5년에 걸쳐 술자리나 회식마다 술을 안마시느라고 극히 불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안마십니다'라고 말을 하면 어떤 선배들은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으나, 상당수의 선배들은 불편감을 표명했으며, 일부 선배는 '그 믿음을 오늘 내가 깨뜨려주마'하는 마음으로 협박하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마시지 않아도 되니까 술잔에 입을 대기만 해'라고 배려인지 회유인지 모를 말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집에 가서 교회에 가서 열심히 '(술자리로부터)나를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기도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술자리는 여전히 힘들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을까. 20대를 학교와 병원에서 보내고, 서른살이 되면서는 가족과 떨어져 타지역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저녁에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자야 긴장이 풀리고 외로움이 덜해졌던 것이. 그 이후에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가족과 같이 지내면서는, 하루 종일 백여명 이상의 환자를 보면서 지친 연후에 저녁에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자는 일이 잦아졌다. 언젠가부터 저녁에 시원한 맥주 한잔은 내 고된 삶의 긴장을 잠시나마 풀어주고 있었다. 내가 20대에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술 마시는 '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나이가 서른을 지나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20대때 내가 열심히 믿었던 '금주령'은, 내 자신이 만들어놓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개인적인 '신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을. 그 당시 나는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서 배운 것을 열심히 지키며 살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가 지키고 있는 신념이 깨어지면 내 자신이 망가질 것 같은 두려움... 혹은 두려운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무언가라도 내 안에 단단해 보이는 것을 심어놓아야 할 것 같아서 만들어놓은 신념일 뿐이라는 것을. 내가 만들어놨던 신념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내가 그렇게도 지키고자 했고, 또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던' 신념들은, 마치 바닷물에 모래성이 녹아내리듯이, 내게 다가온 외로움에, 지친 일상에 어느 순간 녹아져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 사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모래성처럼 태생적으로 단단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은 것인데, 저멀리 보이는 파도 앞에서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당당한 척 할 뿐이다. 어떤 면으로는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세상이라는 파도를 더 많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강한 척 하는 사람들이다. '주일성수'라며 일요일마다 빠짐없이 교회에 가서 예배드려야 된다는 것은, 건강이나 직업의 문제가 약간 생기면 깨지게 된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고 힘주어 말하던 사람들도 본인이 몸이 약해지면 예배를 불참하게 되고, 직장에서 일요일 근무를 요청하면 깨지게 된다. 매주 일요일에 출근하라고 하면 회사를 그만두겠지만, 두어달에 한번정도라면 대개는 타협한다. 소득의 10%로서의 '십일조'는 경제적으로 너무 궁핍해지거나 혹은 너무 풍요로워지면 깨지게 된다. '기도'는 오랜기간 정말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회의감에 부딪히면서 기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돼'라고 요구하는 신앙의 형식은,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긴장감이 팽팽해지면 어느순간 흔들리게 된다. '믿음'이 좋다고 느껴질 때는 어떤 순간이 와도 자신의 '믿음(신념'을 지킬 것 같이 느껴지지만, 막상 우려했던 갈등의 순간이 오면 자신의 신념은 파도앞의 한낱 모래성이 되어버리고 만다. 지나고 보면, 사실은 그렇게 깨어지는 순간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종교 본연의 가치가 아닌 내가 만들었던 신념이 깨어지고, 내가 무엇을 믿었던 것이었는지가 비로소 다가오게 된다. 예배의 의미, 십일조의 의미, 기도의 의미, 그 외 다양한 종교적 형식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로드리고 신부도 그런 갈등을 겪는다. 일본의 현실 앞에서, 무엇보다 자기가 배교하지 않으면 일본인 신도들 여럿이 고통을 받다가 죽게 되는 현실 앞에서, 결국 표면적으로 배교를 하게 되고, 그 대신 일본인 신도들은 살게 된다. 일본인들을 돕기 위해 왔지만, 정작 자신 때문에 일본인들이 죽음에 처하게 된 현실. 자신이 없어져야 혹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해야 일본인들이 살게 되는 현실. 그 모순된 믿음과 현실의 사이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괴로워하다가 배교하게 된다. 


"그는 인간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던 것인데, 사실은 일본인 신도들이 자기 때문에 잇달아 죽어간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행위란 오늘까지 교리에서 배웠던 것처럼, 이것이 옳고 이것이 나쁘고 이것이 선하고 이것이 악하다는 식으로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p.208)"


선과 악이 뒤엉킨 곳. 그 곳은 세상이다. 단순히 좋기만 한 것, 혹은 나쁘기만 한 것은 생각보다 훨씬 적다. 모두가 선망하는 삶의 이면에는 가려진 어두움이나 상처가 있으며, 나빠보이는 것의 이면에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거나 오히려 더 좋은 것이 숨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라서 그렇지만. 선과 악이 뒤엉켜있다는 것, 그것은 유토피아(이상향)에서 벗어나 현실을 살게 되는 시초가 된다. 페레이라 신부는 믿음의 끝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배교했지만, 그가 버린 종교는 표면적 종교-핍박과 가난을 겪어보지 않고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일 것이고, 그 대신 현실을 받아들인 셈이다. 


표면적 종교는 힘든 현실을 살아갈 힘이 없을 때, 현실을 회피하고 이상향(천국)에 관심갖게끔 해주는 역할인 것 같다. 하지만 표면적 종교가 전부인줄로만 알고 살다 보면, 어느덧 원래의 종교인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모래성 같이 사라질 자기 신념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점점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 표면적 종교를 믿기 시작한 이후에는, 점점 표면적 종교를 버리고 현실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은 힘들더라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믿음만 남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다시 이 소설을 읽으며 페레이라 신부의 관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관점일까. 앞으로 십년 이십년이 지나면 미래의 나는 페레이라 신부의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