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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문학

사람의 아들, 이문열, 민음사

사람의 아들.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짐작했어야 한다. the son of Man,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자신을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한 표현이다. 이 소설은, 한국에 전파되어 한국식으로 정착한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쓰여진 소설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수의 일대기를 기록한 4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자신을 '인자(人子: 개역개정,개역한글), 사람의 아들(공동번역), the Son of Man(영어성경)'이라고 불렀는데, 예수의 제자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를 the son of God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자신이 말한대로 사람의 아들이었을까, 주위 사람들이 말한대로 하나님(신)의 아들이었을까, 혹은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주장처럼,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마음속의 영웅상이 투사되면서 신의 아들로 바뀐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사람의 아들이자 신의 아들이었을까.

 

*** 제도적 종교에서 벗어나기

 

소설에서는 그런 예수의 대척점에 새로운 인물을 그려낸다.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 그는 하늘에서 사랑과 자비를 말하면서 성경말씀의 규율을 강조하는 신 대신, 지나칠정도로 가난, 압제 등의 현실에서의 괴로움을 풀어보고자 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이상주의자에게는 현실주의자가 자신의 이상을 방해한다고(조금 과장하면 사탄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현실주의자에게는 이상주의자가 관념에 사로잡힌 얘기만 한다고, 또는 현실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려낸 이야기다. 나는 이상적인 인물보다는 현실적인 사람에게서 공감을 느꼈다. 아닌게 아니라, 소설속의 아하스 페르츠가 겪었던 혼란과, 내가 사회에서 겪었던 혼란이 시공간만 다를 뿐 본질이 유사하기도 하다.

 

전통 유대교 랍비의 아들로 자라면서 기존의 제도적 종교의 교리를 배우던 소년 아하스 페르츠는, 어느 순간부터 교리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랍비인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문에 대해 묻는다.

 

'누구에게서 들었거나 읽은 게 아닙니다. 피상적인 경전 해석이나 이 시대에 유행하는 편견과 오류에서 자유로워지기만 하면 반드시 부딪히게 될 의문일 뿐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일생을 지금의 믿음과 경건으로만 사셨습니까?(p.81)'

 

의문을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만 아버지로부터 들려오는 대답은 '선한 하나님을 믿으라'는 논조의 이야기 뿐이다. 왜 의문을 갖는지조차 이해하지도 못하고, 본인도 고민해본 적이 없을 아버지로서는, 절대적 권위(제도적 종교)에 복종하라,는 답 밖에 들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문에 대답은 커녕 공감받지 못한 아하스 페르츠는, 자신에게 대답을 들려줄 신을 찾아, 집을 나선다. 그런 그를 읽으며 나는,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와서 기존의 기독교에서 배운 교리대로 성경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였으나, 시킨 대로 해도 여전히 현실의 괴로움은 변하지 않던, 그래서 기독교 신앙 좋다는 이와 얘기해보면 성경을 더 읽고, 기도를 더 열심히 해보라는 대답이 돌아오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요즘 말로 하면 신앙적인 '노력'을 해봤는데 안된다고 했더니, '노력'하지 말고 '노오오오오력'을 해보라는 답을 들은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내 영혼의 집이라 생각했던 교회와 기독교로부터 내 자신을 점차 분리시키려고 애썼다. 아니, 내 외부도 내부도 아닌 어떤 힘에 이끌리어, 내가 믿어왔던 영혼의 집인 교회와 기독교로부터 점차 분리되어 갔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성경과 기도만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신(하나님)을 성경 속 문자에 가둔 사람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다가 피식 웃음이 난 것도 그때문이다. 작가는 인물의 입을 빌려 '신을 교회에 가둔 사람들'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도적 종교의 한계-교리대로 해도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를 겪은 나는 제도적 종교에 대해 (지금까지도) 비판적인 입장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되는 존재, 사람

 

신기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제도적 종교의 틀 안에 머물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리대로 해도 인간이 겪는 삶의 문제는 하나도 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교리마저 없으면 삶을 이어갈 힘도 희망도 없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아마도 소설속에서 기독교에 비판적이던 인물 민요섭이, 마지막에 제도적 기독교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것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건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자신의 몸과 생각이 약해지는 것을 느껴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드는 마음이리라. 나도 최근들면서 막연하게나마 제도적 종교안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느끼기 시작하였는데, 소설에서는 이교(異敎)의 '늙은' 제관의 입을 빌어 이렇게 쓴다.

 

'다만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다. 생각해보아라.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구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를.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더러 그 거짓된 믿음을 퍼뜨리고 부추길 때가 있어도 그때조차 우리의 바람은 저들이 공포와 무력감으로 삶에 절망하는 것을 맏는 데 있었다. 우리 자신이나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을 위해 우리가 저들을 속이고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런 자들이야말로 오히려 저들 민중에게 속고 있다(p.120)'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사람. 내가 20대에 그리도 구원을 찾기 위해 기독교에 몰입했던 것은 내가 그 때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고, 30세가 되면서 기독교가 아닌 다른 것에서 구원을 찾기 시작했던 것도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39세가 되어서는, 제도적 기독교에서는 금서(禁書)로 지정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소설을 공감하며 읽고 있는 것도, 지금의 내가 가진 믿음 때문이리라. 사실 현재의 나는 '제도적 종교에서 가리키는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으면 신(하나님)을 문자 속에 갖히게 만들지만, 상징적으로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로움과 풍요로움을 경험하며 살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이, 과거의 제도적 기독교에 대해 문자 그대로 믿던 믿음이 깨어지듯이 깨어질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러한 믿음, 즉 세상의 돌아가는 현실이 어떤지에는 관계없이 나 혼자 만든 상상의 세계속에서, 의심치 않고 당연히 그럴거라 생각했던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지금도 나만 모르는-남들 눈에는 다 보이는- 어떤 관념에 갖혀, 그릇된 믿음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 깊은 속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를 아마도 신(神)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적어도 심리학적인 면에서는 그럴 것이다. 사실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이 특정 종교(기독교, 이슬람 등)이든, 정치인(박근혜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등)이든, 아니면 특정 물건(자동차, 시계, 가방, 신발 등)이나 사람(남자 혹은 여자)이든, 정도가 지나치다 싶은 사람에게는 '귀신에 홀렸다'라고 심심찮게 표현되는 것을 보면, 당사자의 마음 깊은 곳의 어떤 존재가 그 사람을 사로잡아 움직이게 하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가 어디 한둘이랴. 그래서 다신교를 믿는 지역에서는 엄청난 숫자의 신이 존재한다고도 한다. 소설에서도 중동지방에 존재하는 수백명의 신의 이름을 나열하기도 했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배경에서 자라온 나로서는 상당히 낯설기도 하고 종교적인 금기를 대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수많은 욕구와 감정에 휩쓸린 경험을 곰곰히 되돌아보면, 다신교에서 말하는 주장이 그리 낯설지도 않다.

 

*** 전체적 존재로서의 신

 

소설 속 인물 민요섭과 조동팔이 제도적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 만들려고 했던 신의 이미지는 소설 후반에 그려진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절대 선(善)으로서의 신에 대응하는, 지혜로서의 신의 이미지를 묘사한다. 그 둘은 같이 존재해야 온전한 것인데, 구약성경에서는 선(善)한 신으로만 존재해서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지혜 없는 선과 마찬가지로 선 없는 지혜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느냐. 죄는 지혜 없는 선의 딴 이름이며 악은 선 없는 지혜의 딴 이름에 다름 아니다. 너희도 겪었으리라, 자유 없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정의 없는 자유가 얼마나 괴롭고 쓰디쓴 것이었던가를.(p.280)'

 

사실 기독교(교회)에 실망하거나 폄하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선을 추구(착한 일을 하자, 사랑하자)하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새 악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들은 선하다고 주장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느새 악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뀌어있기도 하는 일들을 뉴스를 통해 종종 듣게 된다. 그 외에도 좋은 일인 줄만 알았던 일이 나중에 나쁜 영향을 미치거나, 나쁜 일로만 알았던 일이 한참 뒤에 새로운 의미를 가진 일로 다시 보이는 경우들이 결코 적지 않은데, 제도적 종교에서는 너무나 쉽게 선과 악을 구분해온 것에 대한 실망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작가는 '그 단순함으로 축복받으라(p.48)'며 독설을 쏟는다.  

 

작가가 소설 말미에 그려낸 새로운 신관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심층심리학에서 보는 것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작가가 민요섭을 통해 드러낸, 선과 악, 선과 지혜가 공존하는 신으로서의 이미지는, 심층심리학을 접한 나로서는 낯설지는 않다. 오히려 크게 공감이 가기도 한다. 다만 32세의 젊은 나이에 이 소설을 쓴 작가 이문열씨는, 어떻게 이런 세계관을 젊은 나이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소설 전체에 드러난 기독교 및 비교종교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설득력있는 인물을 만들어내고 소설로 그려내었는지, 나로서는 그게 놀라울 뿐이다.

 

아무튼 보수적 기독교인 혹은 근본주의자라면, 읽기 거북한 소설에는 틀림이 없다. 과거의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제도적 종교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들은 한번 쯤 읽어볼만 하다. 과거 이문열씨의 소설에 열광했던 이들이 어쩌면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적 종교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지혜로웠던 사람들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