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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내 생각

짧은 여행의 기록1 (04/2/11)

짧은 여행의 기록1 (04/2/11)

작성일 2004.06.22 15:25

오전 10시에 집을 나선다.
불과 수 일 전까지의 오늘은, 인천공항 내지는 일본 간사이 공항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차를 끌고 집을 나선다.
혼자가는 일본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누구 말처럼 혼자가는 '엄한' 여행인 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했는데, 나에게는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을 여유가 없었나보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면 그만큼 적은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고, 그러면 기꺼이 해외로 떠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10시에 집을 나선다. 요 며칠을 정신없이 노느라, 해야할 일이 밀려 있었다.
일단 며칠전 산 구두를 교환했다. 끈 없는 구두는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었는데, 사이즈가 조금 큰 듯하여 작은 것으로 교환하려 했는데, 마땅한 것이 없어서 다른 모델을 골랐다.

곧바로 정석으로 가서 지도교수님을 뵈었다. '하느님도 아프다'란 책과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란 책을 선물해 주셨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다. 내가 교수님의 총애를 받을 만한 학생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그 분과 같은 인격, 의사로서의 실력을 닮을 수 있다면.. 예과때 처음 뵈었을 땐 교수님과의 대화가 여간 긴장되는 것이 아니었는데-당시에 느끼기엔 워낙 세세히 물어보시고 논리적인 기억- 지금 같이 medical doctor가 된 후에는(^^) 논리적인 의대교육을 받아서인지, 예전같은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존경하는 교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인한 긴장만 있을 뿐...

지도교수님을 뵙고 본교 정석도서관에 가서 유홍준 씨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3권을 빌렸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의 핵심은 경주인 만큼, 경주에서 보게 될 역사와 그 속에 담겨진 인간사에 대한 감동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은 마음에 유홍준 씨의 책을 '좋은 스승'삼아 떠날 예정이다.

후문가에서 6년동안 백번은 족히 갔을 더블에서 콩비지찌개를 먹고나니 시간은 1시를 넘어 있었다.

성광교회 기도실에서 감사기도와 여행을 의뢰하는 기도, 그 밖에 가슴속에 하고 싶은 말을 올려 드린후 출발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출발지는 성광교회 기도실인 셈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해미읍성까지 왔다. 길을 잘못 탄 것이 아닌가 염려를 했는데, 몇 번 와 본 느낌으로 길을 선택했더니 맞는 길을 골랐다. 해미나들목을 나와 해미 쪽으로 길을 잡으니 곧바로 한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해미읍성찾기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주차를 하려고 성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가는데, 이상한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서문밖 순교성지란 기념비와 같이 있는 자리개돌이었다. 설명인즉,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서, 조선에 처음 천주학이 들어오면서 천주교도들이 박해받을 때 수천명씩 박해를 받아 죽어간 그 자리라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있는 진정한 기독교 성지인 셈이다.

해미읍성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잠시 눈요기감으로나 보고 갈 계획이었는데, 기독교 성지라니. 다른 이에게는 조선시대 지어진 읍성에 지날지 모르나, 나같은 기독교인에게는 새삼 감동을 주는 곳이다. 넉넉히 잡아 200여년 전, 예수 믿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때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음을 말해주는 곳이다. 성 안에는 나무 몇그루와, 조선시대에 동헌으로 쓰인 건물이 두어 채 있었을 뿐, 황량했다. 성 한 가운데에는 수백년 되었을 듯한 고목이 한 그루 있는데,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이 매달려 고문을 받다가 죽어간 나무라고 한다. 유치원에서 단체견학을 온 것으로 보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서른 명 가량의 아이들과, 그들의 인솔교사로 보이는 어른 몇명이 있었을 뿐이다. 마치 200여년전에 바로 이곳에서 자기의 생명과 신앙을 맞바꾼 이들의 울림과 overlap되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읍성 맞은 편에 우뚝 솟은 교회의 첨탑과 십자가 또한 묘한 역사의 대조를 이룬다.

해미읍성을 나와 가까운 예산의 수덕사로 향했다. 유홍준 씨 책에 나와 있듯이, 흡사 중국 무술영화 세트장처럼 변해버린 돌계단이, 감동이 없는 현대인들의 무지함을 말하고 있는 듯 하였다. 절 안쪽에 고려말(1308년인가)에 지어진 목조건물 대웅전이 있었다. 대웅전이 가진, 미학적 또는 역사학적 아름다움은 자세히 모른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철제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도 3~40년이면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시대에, 나무로만 지어진 건물이 700년을 넘게 서 있는 그 모습이, 화려하지도 않고 요즘 지어진 건물보다 크지도 않지만, 말할 수 없는 위용과 안정감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배흘림기둥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정면에서 유심히 봤는데,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대웅전 옆으로 가까이 가서 햇살을 등진 배흘림기둥을 보니, 그 아름다움과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 또한 진리였음을.

수덕사 입구에는 수덕여관이 있다. 유홍준 씨 책에 실릴 만큼, 한 많은 여인의 역사말고 다른 여관과 구분 되는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과연 달랐다. 사진에라도 담을까 하다가, 한 많은 여인의 역사를 개인의 단순한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 같아 그냥 지나쳐왔다.

수덕사를 나오니 이미 해가 주는 밝은 빛이 거의 사라지고 있어서, 오늘의 숙박 예정지인 전주로 향했다. 고속도로보다는 일반국도가 더 정감을 주는 것같아 국도를 타고 전주까지 왔다.

문득 '길'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 길로 가면 '논산'이 나온다, 이 길로 가면 '전주'에 도착한다, 이 길로 가면 '생명'을 얻는다, 이 길로 가면 '진리'에 도달한다... 용감하게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분의 이야기가, 평범한 사람들이 호기부려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전주에 전북대학교가 있더라. 그래서 전주에 대한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다.
숙소를 한참 고르다가 송백장이라는 여관에서 묵기로 했다. 천해보이는 이름을 가진 다른 여관보다는, 안과 교수님이셨던 송백란 선생님생각도 들고 해서, 송백장을 골랐다. 여관 앞에 있던 시골밥상이라는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과연 전라도 음식이었다. 15가지 반찬에 겨우 3500원! 반찬하나하나가 정갈한 것을 생각하면, 인하대 후문에 진출하더라고 후문가를 모두 평정하고도 남을 만한 음식과 가격이었다. 전주에 오면 비빔밥을 먹어야 된다고 하나, 꼭 비빔밥이 아니어도 될 듯 하다.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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