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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내 생각

짧은 여행의 기록2 (04/2/12)

짧은 여행의 기록2 (04/2/12)

작성일 2004.06.22 15:29 

어제는 피곤한 탓인지 TV를 한 시간 가량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여관은 2만원짜리치고는 꽤 괜찮았고, 흠이 하나 있다면 방음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옆방에 웬 아저씨들 예닐곱 명이 고스톱을 하는지 밤새 시끄럽게 놀고 분위기를 험악하게 한 게 맘에 안들었을뿐.
간간히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몇 번 깬거 치고는, 비교적 숙면을 했다. 기분 좋은, 정말 깨고 싶지 않은 꿈도 꾸었고.

핸드폰 알람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7시 20분이다. 너무 일찍 일어난 거 같아 이불속에서 밍기적 거리다가, 오늘 하루가 너무 짧아질까 곧 정신을 차렸다. 이번 여행이 6일계획인지라 6장으로 이루어진 갈라디아서를 하루에 한장씩 묵상하기로 하였고, 오늘 아침엔 2장을 읽었다. 암송하였고, 볼 때마다 새로운 묵상을 하게끔 하는 20절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내가 한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한 선택이란 것을 말씀해주셨다. 마치 내가 큰 용단을 해서 믿음으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택(고난이 동반된)에 의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씀.

씻고 식사를 하고 나니 10시가 조금 넘었다. 아침에 전주박물관을 볼 요량으로 길을 나서다가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데가 신포우리만두이다. 아이러니할수 밖에. 전주까지 와서 인천이 본고장인 음식을 먹게 되다니. 3800원짜리 만두국은 그 자체로 아침식사로 부족함은 없었으나, 어제 저녁을 푸짐하게 먹은 탓인지 타지에서 인천음식을 먹는다는 아이러니 때문인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하고, 가까운 PC방으로 들어와 여행기록을 남겼다. 예과 때 동해안 일주를 할 때 적은 것처럼 무얼 끄적여볼까 했는데, 운전을 해서 그런지 시간이 마땅하지 않고 사실 그보다 글씨를 손으로 쓴다는게 벌써 귀찮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나이때문이라기 보다는 생활방식때문이라고 해야 옳은 말이겠지만.

인터넷으로 어제의 일을 쓰고 나니, 벌써 11시가 되어버렸다. 오늘 아침에 늑장부린건 결코 아닌데, 해 놓은 일없이 정오가 가까워지다니.

전주 인근에 전주 박물관을 갔다. 동현이 형이 전국일주할때 들려봤다길래 나도 들르긴 했는데, 잘 모르겠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여려 유물이 있었으나, 관련 지식이 얇디얇은 나로서 큰 감동은 애초부터 어려운 것이었을지도.

박물관을 나오니 12시다. 저녁때 숙부님 댁을 갈 계획이면 시간이 빠듯하다. 처음 계획에 포함되었던 고창 선운사는, 제대로 보기 위해선 동백꽃이 만발하는 4월이 좋다는 유홍준씨의 말에, 일단 다음에 보기로 하고 담양으로 가닥을 잡았다.

담양시내(?)에 들어와서 식사를 할 요량으로 평범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매일식당과 부부식당을 놓고 비교를 하다가 왠지 매일식당이 끌려 그리로 들어갔다. 어제 저녁에 반찬가짓수가 15가지였던 거에 비하면 6가지의 반찬이 나온 매일식당은 일견 실망스러웠으나, 된장찌개 맛은 역대 최고였다. 모든 실망을 된장찌개 맛 하나로 제압한 매일식당. 역시 인하대 후문에 입성해도 충분할 만하다.

식사를 하고 나니 두시 반을 넘겼다. 볼 건 많은데 시간이 별로 없다. 정말이지 누가 우리나라를 좁다고 했는가. 제대로 보려면 도 하나마다 일주일씩, 전국을 보려면 50일은 족히 걸릴 것을.

정읍에서 담양으로 가는 길, 29번 국도. 높이 솟은 산새를 타고 들며, 차마 덜 녹은 눈옷을 입고 있는 산-이름은 무엇인지 모르지만-이 여전히 감동을 주고 있다. 4년전 대학2년때 영수, 민영, 그리고 부영이와 함께 남도 여행을 왔을 때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곳이 눈 덮인 산이었다. 그때는 그 감동이 해남 대흥사를 보고 느낀 것인 줄만 알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바로 눈 덮인 산이었다. 이 감동을 나중에라도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카메라에 담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 감동을 모두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만든 몸중에서도, 특히 지금 보고 있는 눈(眼)은 정말 훌륭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요즘에 카메라를 사람에 눈에 비유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산을 내려오는 바람과 같이 우리에게 불어온 그 하늘의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꿈이있는자유 4집에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지금 산에서 내려오면서 창문을 열고 산을 내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 노래를 들으니 새롭게 느껴진다. '산에서 내려온다'. '하늘에서 내려온다'. 산이 하늘과 가깝다는, 당연하고도 너무도 가까운 사실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번 여행을 통해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깊이 느끼게 된 셈이다.

담양 소쇄원을 갔다. 원림(園林)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된, 그러나 한창 원형 파괴공사가 진행중인 소쇄원이었다. 유홍준씨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된 때가 비록 꽤 오래 지났다고는 하나, 정말 현 시대를 사는, 그것도 문화재를 관리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무지에 어이가 없다. 소쇄원 내부엔 이미 건물이 두어채 공사중이었고 여기저기 무식의 소치를 드러내는 보수공사 덕분에 옛맛은 반감되어 있다. 다만, 산 속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낀, 설계자의 재치가 뭇어나는 담장이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하는 것이 그나마 낙이다. 몇해전 보길도에서 본 윤선도의 부용정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이것이 원림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이미 국어사전에서도 사라졌다는, 사어가 된 낱말이지만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소쇄원 옆에는 식용정이 있다.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의 식용정. 그 이름 속에 담긴 깊은 뜻. 유홍준씨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읽어보면 잘 나와있다.
감동일 수 밖에. 그러나 역시 자연과 문화유산 속에 담긴 감동을 깎아 내리는 남다른 재주가 있는 우리 시대의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보란듯이 새로운 건물 두채를 짓고 있었다. 어떤 정자에는 갈색 페인트를 시뻘겋게 칠해 놓았고.
식용정 위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경치와, 이렇게 멋들어진 곳에 정자를 지을 줄 알았던 그 운치와, 이름 속에 들어있는 정자 주인의 깊은 뜻만 챙기고 식용정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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