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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언젠가 서점에서, 버틀란드 러셀이 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마주 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기독교를 열심히 믿으려 애쓰던 시기였는데, 그 책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고 책 목차를 훓어보고 내려놓았다. 무신론자로 추정되는 러셀이라는 사람의 논리에 휘말리면 안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모르는 인식-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인식-에 대해 말하는 러셀의 자신감에 대해서 은근한 호기심도 느꼈던 것 같다. 하지 말라고 하면 은근히 더 해보고 싶은 마음,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을 수 밖에 없던 그 마음 말이다. 아직까지 러셀의 책은 읽어보지 않았다.


비슷한 제목을 가진 책 중에, 존 스토트 목사가 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이 있다는 것도 비슷한 시기에 알게 되었는데, 역시 나는 읽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애타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자라기를 열망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독서를 통해 기독교 믿음을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이미 기독교 신앙서적을 많이 읽었던 것이다. 신앙서적을 많이 읽어야 기독교 신앙이 자라는 것이라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 또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과연 기독교가 그런 종교인가 싶었다. 더군다나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서도, 신앙서적을 읽는 것이 실제로 도움이 되기는 하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신앙서적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여전히 미래가 두려웠고 현실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버틀란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와 존 스토트의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상반된 입장의 두 가지 책의 제목을 접한게 이십대 중반이었으니, 벌써 십여년 전의 일이다. 두권다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니, 실제 내용은 내가 책 제목만 보고 상상한 것과 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큰 관계는 없을 듯하다. 책 제목만 보면 당연히 한권은 자신이 왜 무신론자인지, 또 한권은 자신이 왜 기독교인인지에 대해 쓴 책이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십여년이 지나서 이제 곧 나이 40이 되는 지금, 나는 버틀란드 러셀이 지은 제목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에 더 많이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존 스토트 목사가 지은 제목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제목에도 어느정도 공감한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이 어떻게 공존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십여년을 더 살아오면서 나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대극)이 충돌하지 않고도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두 가지 가치나 주장은 처음엔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며 존재한다. 이 상황을 사람들은 모순이라고 부른다. 모순의 상황에 있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하지만 이 시간을 어느정도 견디어내면, 상반된 두 가지는 상대방을 없애지 않고서도 둘 다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를  사람들은 역설이라고 부른다. 


내가 만약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이나 책을 쓰고자 한다면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러셀은 어떻게 자기의 주장을 전개해 나갔는지는 책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다. 나는 이런 주장을 펼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마주해야 하는 삶의 숙제를 회피하려는 마음에, 신의 이름뒤에 자신의 문제를 숨겨버리며, 그 문제를 나를 대신해 신이 해결해달라고 한다고. 물론 사람은 자신이 풀수 없는 문제를 많이 마주치게 되지만, 자신이 결국 풀어야 되는 문제까지도 신의 이름뒤에 숨겨버리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참 많은 것 같다. 나도 여러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의 특징은, '아무리 기도해도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서, 내가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요약되는 경험이다. 돈이 필요해서 기도했는데 돈이 생기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직접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벌었다는 식의 이야기나, 병의 치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다는 식의 이야기, 특정 학교에 합격하기를 바랐지만 합격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재수 삼수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하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면 그래도 상황은 좀 낫다. 직접 나서지 못하고, 기도만 더 열심히, 예배만 더 열심히 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자기자신의 힘으로 하지말고 하나님의 힘으로 될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은 믿음이며,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믿음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응답중에 '네가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라'라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배제하고, 무언가 마술적인 방법으로 '짠~!'하고 사태가 일시에 해결되기를 기다리지만, 실제로는 기다리다가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내가 만약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이나 책을 쓰게 된다고 해도,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존 스토트 목사는 어떻게 자신의 주장이나 경험을 전개해갔는지는 모른다. 나는 이런 주장을 펼 것 같다. 살다보면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 노력해도 어쩔수 없는 괴로움을 대하는 순간에, 인간으로서 한없이 무력감을 느끼는 그 순간에.... 나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나를 구원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리스도교를 선택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기 보다는, 내가 살아내야 하는 삶의 여정이 너무 두렵고 힘든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 구원자(그리스도)였고, 그러기에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쓸 것 같다. 하지만 만약에 서양식 혹은 한국식 기독교가 닿지 않은 시공간에서, 비슷한 초월적인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경험도 그대로 인정해 주고 싶다.


어떤 문제를 내가 풀어야 되고, 어떤 문제를 내가 풀 수 없는지 그것을 알아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같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이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살아봐야 아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런 기도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신이시여 제게 주소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수 있는 지혜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를 괴롭히는 가장 큰 대극(두가지 상반된 가치)은 따로 있다. 삶과 죽음. 인간이 풀기 어려운 두 가지 대극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삶을 살아가려면 죽을만큼 힘들때가 있다는 것도, 죽음의 앞에서 살고 싶은 갈망이 극대화된다는 것도 이제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 큰 대극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종교의 존재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들 종교의 신 혹은 교주가 죽음을 이기었다고 선언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자의 삶으로 체험되지 않은 메시지라면, 듣는이에게는 공허하게만 느껴지므로, 듣는 사람은 그들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살면서 마주치는 많은 문제와 괴로움을 풀기 위해서는, 한때는 완벽한 논리가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 보니, 적어도 내게는 논리보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버틀란드 러셀의 무신론자를 위한 논리이든, 존 스토트의 유신론자를 위한 논리이든 지금의 내게는 크게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어느쪽의 논리이든 지금의 나는 둘다 수긍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거대하고 광활한 대자연 속에 의미있는 존재로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젠가 내가 삶을 마치는 날이 가까워오면 아마도 그때는, 출생전에 경험해보았으면서도 출생 이후에는 경험해보지않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나를 반겨줄 환한 빛줄기같은 느낌을 경험하게 되면 좋을 것 같다. 나의 경우는 그 느낌의 희미한 실루엣을, 깊은 의미를 전달해주는 성경속 상징적인 이야기와 음악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신을 찬미하는 음악을 작곡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음악과,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Nearer my God, to Thee)같은 찬송가를 들을 때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 느낌이 전해질 듯 말 듯 전해져 오는 것 같다. 그 느낌이 내게 전해져올때 내게 느껴지는 반응은 보통 '신비로움'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느낌으로만 알수 있는. 바흐의 음악과, 오래된 찬송가를 듣고 있을 때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신이시여, 제게 주소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출처: http://bocki.tistory.com/505 [진유와 진하네 집]로부터,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나를 잡아주는 느낌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성경에서 마음 속 깊이 울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발견할 때와, 음악에서 특히 신을 찬미하는 음악을 지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음악이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Nearer, My God, to Thee)'같은 찬송가를 들을 때, 그런 느낌을 흐릿하게나마 느껴본다.은혜스럽게도 그 느낌이 내게 전해져올 때 나의 반응은 보통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같다. ㅇㄹㅇ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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